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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살인사건 (제8회)

  • 등록 2007.04.01 15: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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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그 웃음 속에 뭔가 그늘이 끼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경미는 지욱의 곁에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헤어졌다?”
우형빈의 말에 지욱은 현실로 돌아왔다. 우형빈은 열심히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인을 마지막 본 것은 서마담이군.”
“현재로는 그렇지.”
“서마담 집을 아나?”
“몰라.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지 않아.”
“하긴 그렇군.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일단 헤어지지. 난 서마담을 쫓겠네. 자넨 집으로 돌아가 있어. 혹시 전화가 올지 모르니까.”
순간 지욱의 얼굴에 서글픈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가 없는 텅빈 집에 혼자 돌아가기 싫었던 모양이다.
“서마담을 쫓으면 뭘 하나. 우리 어디가서 한잔 하지.”
“왜 이래! 지금 술이나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런 때일 수록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 돼.”
“미안해.”
“원 사람도... 나중에 전화할게.”
우형빈은 다시 양장점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지욱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욱의 눈앞에는 네 갈래로 갈라진 네거리가 보였다. 한쪽은 미도파 쪽으로 가는 길이요, 또 한쪽은 사보이 호텔로 가는 길, 다른 한쪽은 명동성당으로, 또 한쪽은 을지로 쪽으로 가는 길...
도대체 아내는 어느 길로 갔단 말인가? 그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지욱도 지금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전혀 몰랐다. 역시 집으로 가야 하는가...
지욱은 집에 전화를 해 보았다.
“여보세요, 나야. 아직 연락 없니?... 알았다.”
지욱은 실망하여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마 후 지욱은 어느 스탠드바에 앉아 있었다. 연거푸 독한 스카치를 스트레이트로 들이마시자 바텐더가 근심스러운 듯이 지욱을 바라봤다.
“선생님, 너무 마시는데요.”
“염려 말게. 난 술이 세다네. 한 잔만 더.”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서 따르기나 해.”
호박색 액체가 술잔속에 찰랑거리게 따라졌다. 그 술잔 속에서 경미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결혼 1개월 만이다.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현재까지 아내는 만 27시간 동안 종족을 감추고 있다.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아내가 아니라, 벌써 지욱과는 점점 멀어져 가는 아내였다.
지욱은 괴로운 듯이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한 잔만 더”
또 잔이 채워졌다. 자꾸만 사위스러워져 가는 지욱이었다.
아내는 어디에 있는가? 살아만 있어다오. 경미! 지욱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미스터리, 또 미스터리!
벌써 명동은 밤을 잉태하고 있었다. 거리의 쇼윈도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가로등에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디쉐네>의 유리문이 열리고 서정숙 여사의 화사한 모습이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분명히 혼자였다. 시간은 저녁 7시.
우형빈은 어슬렁어슬렁 그 뒤를 따랐다. 역시 서정숙은 도보로 코스모스 백화점 앞까지 걸어와 지하도를 통해 소공동 조선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왕래하는 사람이 많은데도 서정숙의 하이힐 소리가 유난히 뚜렷하게 우형빈의 귀에 들렸다.
‘저 여자가 조선호텔에서 누굴 만나기로 한 것일까?’
우형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서정숙은 우형빈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조선호텔 앞에서 다시 시청 쪽으로 꺾어지더니 시청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집어탔다.
너무 예상밖이라 우형빈은 당황하다가 겨우 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속은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우형빈은 그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밖의 풍경을 내다봤다. 최소한 서정숙의 집만이라도 알아두는 게 미행의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경미를 마지막 본 것은 현재로서는 오직 서정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만한 여자가 버스를 탄다는 게 도무지 이상했다. 고급승용차가 아니라면 적어도 택시라도 타고 가야 한다. 그녀는 상당한 여류명사이며 더욱이 우일재벌 김상필 회장의 애인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 젖어 서정숙을 외면한 채 종로거리를 내다봤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실례합니다.”
우형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귀 밑에서 은방울 굴리는 듯한 서정숙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네? 저 말입니까?”
우형빈은 현장을 들킨 범인처럼 황망히 대답했다. 터부 향수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까 날 찾아왔던 분이시죠?”
“아, 네. 여긴 웬일이십니까?”
“댁이야말로 웬일이시죠? 내 뒤를 줄곧 따라왔었잖아요.”
“제가요? 제가 왜 마담 뒤를 따릅니까?”
“시침 떼두 소용없어요.”
서정숙은 베시시 웃었다.
“댁은 거짓말쟁이군요. 나경미씨가 열쇠 꾸러미를 잃어 버렸다는 것도 거짓말이구요. 우리 가게에서 점원 아가씨와 같이 그걸 찾았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호호, 댁의 정체는 뭐죠?”
우형빈은 아찔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미행을 눈치채이고 오히려 역습을 받고 있으니, 우형빈으로서는 대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흠, 보통여자가 아니다. 버스를 탄 것도 다 계산이 있어서였구나.’
“어서 말씀하시죠. 댁의 정체는 뭐예요? 흥신소? 아니면 경찰인가요?”
“허허, 신경과민이시군요. 제가 그런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십니까?”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다시 역공세를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좋아요. 그래도 역시 나경미씨 운전기사는 아니죠?”
여자는 이럴 때 약간 교활해진다. 이럴 때는 그걸 승인해 남자의 도량을 보이는 게 좋다.
“바로 보셨습니다. 난 운전기사는 아니오.”
“그러시담 뭐죠?”
서정숙은 한치도 늦춰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목적을 이루는 첩경이었다.
“사실은 김지욱의 친굽니다.”
“김지욱이라뇨?”
그 말을 꺼내면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서정숙은 생판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우일재벌 김상필 회장의 외아들 말입니다. 알고 계시죠?”
순간 서정숙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여자는 교활했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애써 태연했다.
“아니, 그 분을 어떻게?”
그러면서도 여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흑빛이 돼 가는 서정숙의 얼굴을 재빨리 훔쳐본 우형빈은 결정적인 급소를 찔렀다.
“회장님과의 관계, 부인하시진 않으시겠죠?”
“우리 차에서 내릴까요? 잠깐 얘기하고 싶어요.”
“좋습니다.”
서정숙은 의외로 쉽게 항복했다. 우형빈은 그녀와 부딪친 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지금 목적은 어디까지나 나경미의 행방이었다. 거기에 김회장과 서정숙의 관계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두 사람은 우선 버스에서 내렸다. 종로 5가였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샐러리맨들의 발걸음이 바쁠 때였다.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뭘 좋아하세요?”
서정숙이 먼저 제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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