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감수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다
윤이상은 현재까지 세계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로,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에서 78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유럽에서 현대를 움직인 5명의 작곡가에 꼽혔으며, 120여 곡의 현대음악을 작곡했다.
1995년 5월에는 독일 자아르브뤼켄 방송이 뽑은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는 등 세계 음악사의 중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971년 킬 문화상과 1988년 독일 연방공화국 대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1991년엔 국제현대음악협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됐고, 1992년 플라케테상 (함부르크아카데미), 1995년 괴테상 (독일문화원), 1998년제 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한겨레통일문화재단)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국회영문홈페이지에 월드클래스아티스트로 등재됐다.
그의 음악은 ‘서양현대음악 기업을 통해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탁월하게 표현했다’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 기법을 서양악기에 완벽하게 결합시켰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볼프강 부르데 독일예술대학 교수는 윤이상에 대해 “1977년 9월, 필하모닉에서 들었던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서 나는 그처럼 창조적인 인간, 위대한 작곡가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그의 감내력에 의해 내부로부터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동베를린 사건으로 정치범으로만 굳어져
그는 1956년 프랑스를 거쳐 독일 베를린에 유학하여 유럽음악계에 두각을 나타내던 중 동베를린 사건에 휘말려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대대적인 규명운동으로 풀려나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모국인 한국에서는 정치적인 인물로만 왜곡 인식돼, 작곡가 윤이상의 위대한 음악성은 간과되어 왔다. 당시 사건이 조작된 누명이었음이 법적으로 확인됐으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이들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은 이 시대의 숙제로 남아 있다.

경상남도 통영이 고향인 윤이상은 독일 베를린 자택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놓고 매일 바라볼 정도로 조국을 평생 그리워했으나, 결국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독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일제시대와 분단과 이념의 상처 등 한국 근대사의 상처가 고스란히 얼룩져있는 한국사의 자화상과 같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한국인 윤이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어느새 12년이 됐다.
베를린, 평양 포함 12개 행사 열려
천재 작곡가로서의 윤이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서울-윤이상평화재단은 11월10일까지 ‘2007 윤이상 페스티벌’과 제1회 ‘국제윤이상음악상’을 마련했다. 이번 행사는 탄생일(9.17)부터 서거일(11.3)까지 윤이상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품들을 축제에 담아내고자 하는 기획의도를 담고 있다. 세계적 음악가를 기리는 축제인 만큼, 행사는 베를린과 평양에서도 음악회가 열린다. 한국에서 10개, 해외에서 2개, 총12개의 행사가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지금까지의 작곡가 윤이상에 관련한 국내 행사 중 가장 큰 규모의 행사이다.

특별히 이번 행사에는 윤이상이 투옥되었을 때 유럽에서 윤이상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 음악인 중 한 명인 지휘자 프란시스 트라비스가 방한해 페스티벌 기간 여러 행사에서 윤이상 작품을 지휘하고 음악상 심사를 할 예정이다. 그는 윤이상의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 ‘바라’, ‘콘체르트 피구렌’ 등의 작품을 세계 초연할 정도로 윤이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윤이상 스페셜리스트다. 또한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인 거장, 니콜라우스 후버 (Nikolaus A. Huber)와 베를린 음대에서 윤이상에게 작곡 공부를 배웠던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 이사오 마츠시다 (Isao Matsushita) 역시 이번 페스티벌 참가와 음악상 심사를 위해 방한한다.
‘나의 음악은 언어이며, 노래이며, 호소이며, 시이며, 환상이며, 암묵의 극적 세계다’고 했던 윤이상. 고국 땅에서 그는 지인들에 의해 음악으로 다시 태어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