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2026.03.12 (목)

  • 맑음동두천 13.2℃
  • 흐림강릉 5.3℃
  • 구름많음서울 13.0℃
  • 맑음대전 13.6℃
  • 흐림대구 9.1℃
  • 구름많음울산 10.7℃
  • 맑음광주 12.9℃
  • 맑음부산 10.5℃
  • 맑음고창 9.5℃
  • 구름많음제주 11.4℃
  • 맑음강화 12.0℃
  • 맑음보은 12.2℃
  • 구름많음금산 12.0℃
  • 맑음강진군 12.6℃
  • 맑음경주시 10.1℃
  • 구름많음거제 9.3℃
기상청 제공

사회

[4·3사건 70주년] 그날 제주엔 무슨 일이 있었나

URL복사

美군정기 발생해 7년간 제주 초토화
6·25 다음 가장 큰 인명피해 발생


[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올해 4월3일은 ‘제주4·3사건’의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3일 미군정의 강압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계기로 제주도에서 발생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가장 컸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70년 전 제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3년 정부에서 발행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내용과 이후 보완된 자료들을 간추려 정리한 제주4·3평화재단의 ‘제주4·3 바로알기’에 따르면, 4·3사건은 미군정기인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1948년 ‘4·3 무장봉기’가 일어나며 확산됐다.


‘3·1절 발포사건’은 미군정의 정책 강행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만과 경제적 어려움이 중첩된 상황에서 1947년 3·1절 기념행사 가두시위 도중 경찰의 총격으로 주민 6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말발굽에 치여 다친 어린아이를 기마경찰이 그대로 두고 간 것에 대해 관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무장경찰들이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도내 민심이 극도로 악화됐으나 미군정과 경찰은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 같은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좌익진영이 폭로하고 나선 데 이어 제주에서 민·관 총파업이 진행됐다. 미군정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며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조작하고 탄압을 이어갔다.


이후 1948년 1월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명백해지자 남로당이 5·10 단독선거 거부를 주된 명분으로 내걸고 1948년 4월3일 도민을 탄압하던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공격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5월10일 무장대의 투표소 공격과 이에 동조한 다수 주민들의 선거 거부로 인해 제주도 선거구 3개 중 2개가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 처리됐다.


이승만 정부 집권 후 중산간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인 ‘초토화작전’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이 도피 입산하게 됐고, 수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무장대가 일부 마을에 대한 보복 습격을 감행하면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남녀노소 무차별 학살


4·3사건은 7년여에 걸쳐 관련 사건이 지속되면서 제주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5000~3만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가옥 4만여채가 소실됐다. 중산간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과 각종 산업시설도 파괴됐다.


1954년에야 사건이 종료돼 폐허가 된 마을의 복구와 정착사업이 진행됐으나 4·3사건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오랜 기간 이어졌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옭아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콤플렉스(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 등 정신적 피해 또한 컸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14년 5월23일까지 실시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심사에서 인정된 희생자와 유족의 수는 각각 1만4231명, 5만9225명에 달한다. 희생자는 △사망자 1만245명 △행방불명자 3578명 △후유장애자 163명 △수형자 245명 등이다. △21~30세 희생자가 5461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11~20세(2464명) △31~40세(2291명) 희생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 84.3%(1만2000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2.3%(1756명)로 구성돼 있다. 전체 희생자 중 △10세 이하 어린이가 5.4%(770명) △61세 이상 노인 6.3%(901명) △여성이 21.1%(2990명)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작전이 전개됐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저작권자 Ⓒ시사뉴스
제보가 세상을 바꿉니다.
sisa3228@hanmail.net





커버&이슈

더보기

정치

더보기
장동혁, 윤석열과의 절연 본격화...의료·노동정책 공개 반성·사과...“결의문 존중”
[시사뉴스 이광효 기자] 국민의힘이 9일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개최해 소속 국회의원 일동 명의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가운데 국민의힘 장동혁 당 대표도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장동혁 당 대표는 10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서 열린 한국노총 창립 8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해 당내 노동국 신설 등에 대해 “우리 당이 노동자의 목소리를 더욱 세심하게 챙겨 듣고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의 새 길을 열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라며 “동시에 지난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 추진 과정에서 노동자 여러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했다는 우리 당의 반성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우리 당은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자 여러분과 함께 올바른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동혁 대표는 11일 국회에서 대한의사협회 주최로 개최된 ‘성분명처방 저지 궐기대회’에 참석해 “윤석열 정부에서 의료계의 목소리를 충분히 챙겨 듣지 못하고 급하게 의료개혁을 추진하다 결국 실패했다”며 “그 과정에서 국민들께 불편을 드리고 또 의료계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께 상처를 드렸다. 저희 국민

경제

더보기

사회

더보기
CJ문화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라이브 클럽 데이: 드림 투 스테이지’ 개최... 재즈부터 하드록까지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CJ문화재단이 설립 20주년을 기념해 ‘라이브 클럽 데이’와 협업하여 오는 3월 27일 ‘라이브 클럽 데이: 드림 투 스테이지(LIVE CLUB DAY: DREAM TO STAGE)’를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CJ문화재단은 “기업은 젊은이의 꿈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이재현 이사장의 사회공헌 철학을 바탕으로 2006년 설립되어 젊은 창작자의 개성이 존중되고 소중한 꿈이 실현되면 문화는 더욱 다양하고 풍성해진다는 믿음으로 다채로운 장르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문화생태계를 조성하고, 우수한 인재와 다양한 콘텐츠를 더 넓은 세상에 전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인디 뮤지션 지원사업 ‘튠업(TUNE UP)’을 비롯해 ‘유재하음악경연대회’, ‘CJ음악장학사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음악 분야의 젊은 창작자를 발굴·지원하며 건강한 문화생태계 조성에 기여하고 있다. CJ문화재단은 2015년부터 홍대 인디 음악 신을 대표하는 공연 축제인 홍대 ‘라이브 클럽 데이’에 CJ아지트(광흥창)을 공연장으로 제공하며 인디 음악 시장과의 상생을 이어오고 있다. ‘라이브 클럽 데이’는 홍대 일대 라이브 공연장에서 동시에 다양한

문화

더보기

오피니언

더보기
【박성태 칼럼】 분노를 잠재운 적절한 리액션과 공감의 힘
갈등의 시대, 우리는 왜 먼저 ‘앉아도 될까요’라고 묻지 못하는가. 지난 2월 25일 오후 4시 30분경, 오이도에서 진접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4호선 안은 여느 때보다 고단한 공기로 가득했다. 출근 시간대가 아닌데도 노인석 주변은 빈틈없이 붐볐고, 연로한 분들이 서 있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어느 정류장에서인가 붐비는 노인석의 중간 한 자리가 나자마자 한 어르신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평화는 채 두 정류장을 가기도 전에 깨졌다. “아 XX, 좀 저리로 가라고!” 먼저 앉아 있던 노인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과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좁은 자리에 가방까지 메고 끼어 앉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로 앉은 이는 “나도 앉을 만하니 앉은 것 아니오”라며 항변했지만, 쏟아지는 폭언 앞에 결국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래, X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자리를 뜬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험악해진 분위기 탓에 어느 누구도 그 빈자리에 선뜻 앉지 못했다. 분노의 에너지가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오지라퍼 계열인 필자는 객기 부리듯 용기를 냈다. “여기 좀 앉아도 될까요?”라고 묻자, 화를 내던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