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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조선왕조는 사라졌지만 종묘는 살아남았다” 식민 체제 아래 재편된 종묘의 이면과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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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신간 『일제강점기 종묘 연구』(이욱 지음) 발간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일제강점기 이왕직(李王職)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종묘가 식민지 제도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존속했는지를 규명한 『일제강점기 종묘 연구』(이욱 저)를 펴냈다. 

 

이번 신간은 ‘단절’ 또는 ‘훼손’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 식민 권력의 제도적 틀 안에서 종묘가 어떠한 논리와 방식으로 재편되어 운영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파헤친 역작이다.

 

국가의 대사(大祀)에서 이왕가(李王家)의 집안 제사로의 위상 격하

이 책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지점은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면서 벌어진 제례의 구조적 변동이다. 

저자는 1908년 ‘향사이정(享祀釐整)’ 조치와 1910년 강제 병합을 거치며 종묘 제향이 국가의 안녕을 비는 대사(大祀)에서 한 가문의 조상을 모시는 사적인 ‘가문 제사’로 축소된 과정을 추적한다. 특히 축식(祝式)의 변화와 제향 범위의 축소는 조선의 유교적 예법이 일본 천황제 하의 식민지 행정 기구인 ‘이왕직’의 사무규정으로 편입되어 가는 제도적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성역인 종묘 제기(祭器)에까지 부여된 관리 번호와 일본어 명칭

근대적 관리의 엄격한 논리는 의례를 구성하는 가장 말단인 ‘물건’의 영역까지 파고들었다. 저자는 당시 작성된 물품 대장을 정밀 분석해, 성역이어야 할 종묘가 철저한 관리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포착했다. 조선 고유의 이름을 가졌던 신성한 제기와 기물들이 대장 속에서는 ‘바케쓰(양동이)’, ‘맛치(성냥)’, ‘잉키(잉크)’ 등 일본식 보통명사나 가타카나로 기재되고, 효율적인 통제를 위한 일련번호가 부여되었다. 이는 종묘의 신성성이 표준화와 효율성을 앞세운 근대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해체되고 재편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다.

 

공식 시스템의 이면과 하급 직원들이 지탱한 비공식 영역

거대한 체제 변화 속에서 종묘를 실제로 지탱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놓치지 않았다. 제관이 떠난 자리를 메운 전사(典祀)와 수복(守僕) 등 하급 직원들에게 종묘는 신성한 공간이자 생계의 터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유교적 위계가 지배하는 종묘 담장 안에 ‘고려 공민왕 신당’이라는 이질적 공간이 공존했고, 수복들이 이를 별도로 관리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공식적 영역의 발굴을 통해, 공식적인 이왕직 체제 이면에서 민간 신앙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음을 밝혀내며 종묘를 훨씬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공간으로 그려낸다.

 

식민 권력의 침투와 전통의 딜레마 속 치열했던 논쟁

나아가 이 책은 고종과 순종의 국장, 부묘 과정을 통해 식민 권력이 의례 깊숙이 침투한 양상을 포착했다. 장례 절차에 일본식이 섞여들고, 종묘 내에서 일본 기념일 행사가 열리거나 전시체제하에 방호 훈련이 실시되는 모습은 당시 종묘의 불안정한 위상을 대변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단순히 훼손의 역사로만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의 근대식 제도와 조선의 전통이 충돌하고 교차하며 새로운 의례 문화를 만들어낸 역동적인 공간으로 해석한다. 이왕가 예식의 정당성을 묻거나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 전통을 고수하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던 당대의 논쟁은 이러한 저자의 시각을 뒷받침한다.

 

3년의 대형 과제, 종교학적 시선으로 확장한 종묘 연구의 결정판

이 책은 저자가 3년에 걸친 대형 연구 과제를 수행하며 이왕직의 방대한 1차 사료를 집요하게 파고든 결실이다. 저자인 이욱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2009),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2015),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2017) 등 굵직한 저술을 통해 종교학을 토대로 조선시대 국가 의례와 종묘 연구를 선도해 온 이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다. 특히 그의 전작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정제와 속제의 변용』을 통해 왕실 의례의 공간성을 탐구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도서로도 선정된 바 있다. 이번 신간은 전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되, 연구의 범위를 일제강점기라는 격변의 시간과 ‘이왕직’이라는 제도로 획기적으로 확장한 후속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적 사료 분석에 종교학적 통찰을 더해 이왕직의 건조한 행정 문서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읽어낸 이 책은, 독자들에게 잃어버린 왕조의 뒷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마주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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