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원필환 기자]수출 부진에 내수마저 성장이 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의 재정 확대 요구가 민간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거세지고 있다. 특히 국책연구기관인 KDI도 우리 경제의 성장세 둔화를 공식화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 정권 들어 이미 두 차례나 추경을 한 데다 올 초 21조원 규모의 미니부양책까지 내놓은 정부로서는 또다시 대대적 재정을 투입하기가 힘들다는 입장이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앞선 재정 투입으로 재정건전성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돈을 풀어도 쉽사리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니 재정을 쏟아붓기 어렵다며 기존의 재정 보완책으로 마련된 재원을 잘 쓰는데 당분간 집중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7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통계청 등에 따르면 우리 수출은 14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역대 최장 기간이다. 장기화된 저유가 흐름, 중국의 경기 둔화 등으로 앞으로도 수출 실적 회복은 쉽지 않다는 전망이다.
수출에 비해 그나마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던 내수마저도 올 들어 회복세가 꺾이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1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소매판매액 지수(-1.4%), 서비스업생산(-0.8%), 설비투자(-6.0%) 등이 모두 감소세를 나타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도 우리 경제의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 KDI는 이날 'KDI경제동향'을 통해 "최근 주요 지표의 부진이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세계 경제의 성장세 둔화로 수출이 큰 폭의 감소세를 지속하고 있고 내수 전반의 개선 추세도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의 성장률 둔화도 부양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5일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 제12기 4차회의에서 올해 경제 성장률 목표를 6.5~7%로 제시했다. 이는 중국이 제시한 경제개발 목표 중 가장 낮은 수치다.
이 같은 경기 부진이 빠른 시일 내에 끝날 가망성이 낮다는 판단이 대세를 이루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추경 편성, 기준금리 인하 등의 주문이 나오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6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현 경기 상황은 외수 불황이 내수 불황으로 전염되는 단계로 이를 방치할 경우 장기간 경기 회복이 지연될 수 있다"며 "선제적인 추경편성 및 금리인하 정책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연구원은 "거시경제 정책이 최근의 경기 침체 문제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고 그 효과도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미시 정책과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거시 정책의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재정건전성이다. 지난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추경을 편성하면서 올해 우리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40%를 넘어설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는 비교적 낮은 수준이지만 이는 막대한 공기업 부채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공공부문 부채를 포함할 경우 부채비율은 60~70%까지 치솟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저출산·고령화 사회에서 앞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복지재정을 감안하면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이 때문에 재정건전성을 지킬 책무가 있는 기획재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대대적인 재정 투입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경제학 이론으로는 통화와 재정을 확대할 경우 총수요가 늘면서 경기가 살아나게 돼 있지만 이 논리가 잘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며 "언제까지나 재정을 확대할 수는 없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 오히려 재정을 타이트하게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정부 입장에 전문가들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추세다. 특히 단기적인 부양 확대를 계속할 경우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의견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정을 투입하면 불쏘시개가 돼 반짝하는 효과는 있지만 세수도 걷히기 힘든 상황에서 빚을 내면 미래 시대가 갚아야 할 부담이 막중하다"며 "지금 재정건전성을 소홀히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도 "단기재정확대를 늘리면 당장의 성장률은 높아질 수 있겠지만 국가부채가 누적되고 성장을 계속하지도 못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성장 활력을 높이는 쪽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기준금리 인하 카드는 아직 유효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전 세계적으로 마이너스 금리 도입이 확산되면서 상대적으로 1.50%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는 아직 금리 인하 여력이 있다는 것이다.
허문종 우리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경기가 회복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기준금리 인하가 필요할 것 같다"며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금리인하가 된 것에 대해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것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다른 나라가 마이너스 금리처럼 탄력적인 통화정책을 쓰고 있는 만큼 우리도 이 변화에 맞춰 신축적인 금리 운용을 할 필요가 있다"며 "물가 수준을 고려할 때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통화정책에서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통화정책 기조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인 만큼 금리는 더 낮출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전 교수는 "예전에는 금리를 음수로 쓸 수 없으니 한도가 있는 만큼 쉽게 쓰지 못하는 수단으로 인식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화했다"며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일단 통화정책을 쓰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