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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문 닫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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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여인이 짐을 가지러 왔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애원해보기 위해. 여인이 먼저 말했다. 새 애인이 기다리고 있어서 자기는 급하다고. 남자는 한마디도 못했고, 여인이 짐을 챙기며 코앞에서 오락가락하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여인은 떠나고 문은 닫혔다. 그후로도 몇시간 동안이나 남자는 꼼짝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은 이별 이야기 중에 가장 쓰라린 이 장면이, 요즘 자주 생각난다. 텔레비전 앞에서 참담함과 무력감을 느끼는 모든 이들은, 이 남자 처지가 아닐까. 나와 내 지인들도 그렇다. 우리는 모인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는 해야 할까 상의하고 팔레스타인 친구들에게 전화도 건다.
"성금을 모아 가자에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런 생각을 해줘서 고마워요. 물론 가자 시민들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한테 가자 시민을 죽이지 말라는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시위를 하고, 인터넷과 언론매체를 통해 그런 의견을 밝히고, 그런 글을 쓰고……"
그렇지! 우리는 할 일의 목록을 만들고, 계획을 짜고, 역할을 분담한다. 뒤풀이 분위기는 저조할지언정 그래도 열심히 해보자는 바람직한 결의를 하고 헤어진다. 그러고는 한 이틀 동안은 서로 일절 연락하지 않는다. 하지 못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 이틀 동안 우리는 각자 똑같은 짓거리를 한다. 그저 꼼짝하지 않는다. 맡은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시무룩한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버겁다.                                                                     *
'팔레스타인' 하면 깨지고 터진 모습으로만 세계 언론에 나오는 게 문제라던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이, 이메일을 보내는데 피범벅 사상자들 사진뿐이다. 가자 시민을 죽이지 말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져야 한다던 그 작가가 그런 칼럼 청탁을 거절한다.
"칼럼을 쓰려고 한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글을 써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을 아무래도 떨칠 수가 없네요."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아도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던 팔레스타인 친구에게 이번에도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편지를 썼더니 이런 답장이 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도가 아니라 힘이야. 힘이 없으면 사람은 신의 눈에, 그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의 눈에 보이지도 않아. 힘없는 사람은 울 수야 있겠지. 그러면 여기저기서 어떤 이들이 동정해주겠지. 그게 다야. 주류는 그 약자의 눈물이 세계 평화를 저해한다고 비난할 거야. 힘이 신이야. 힘이 인간성이야. 힘을 갖기 전까지는, 우린 아무 것도 아니야."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피 흘리지 못한다. 1천에 달하는 사망자와 4천이 넘는 부상자의 '숫자' 또한 마찬가지다. 피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흘린다. 많은 이들의 인생이 바뀌었고, 바뀔 것이다. 죽은 자는 인생이 끝나고, 다친 자는 그 상처와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 가족들은 슬픔과 실제 부양의 짐을 평생 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는 가자 시민들은, 그전으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다. 식탁에 앉으면 죽어가는 엄마 옆에서 공포에 질린 가자의 어린애들이 생각나서 목이 멘다는,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의 친구들도 어떤 고비를 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자문해본다. 정말로, 정말로 나는 슬픈가? 내가 팔레스타인 사람도 아랍인도 아니므로 분노와 슬픔이 덜한 거야 어쩌면 당연하겠으나, 내 안에 있는 일말의 공감조차 이제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은 까닭이다. 초현실을 가자에서 현실화하는 주체도, '이스라엘의 전략'이 아니라 그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이 어쩌면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는지, 치를 떨면서 뉴스를 보다 보면 나는 이상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생각이 뒤집어진다. 인간이 저런 짓을 안할 수는 있을까? 저럴 힘과 기회가 있는데 자제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가? 과연 나는 그걸 믿었을까?
무엇인가 문 닫고 가버렸다. 홀로코스트 때, 혹은 6·25전쟁 당시 양민학살 때, 아니 한참 전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때, 그보다 먼저 십자군전쟁 때 진작 떠났거나, 심지어는 온 적도 없는 허깨비를 경전이나 교과서가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지금 여기에는 없다. 떠난 것은 평화, 사랑, 자비, 진리, 정의, 진보 따위 온갖 좋은 말들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우리가 배웠고 또 가르쳤던 개념과 가치들이다. 그 인간이 떠났다. 다른 건 아무리 헷갈려도 그 부재만은 분명하다. 의자에 남은 채로 우리는 마비되어버렸다. 우리는 다 실패했다. 저마다 마음의 가장 밑바닥이 쑥 빠져버렸다.
"나는 내 영혼이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나, 동시에 싸움으로 내 영혼이 얼룩지지 않도록 경계할 것이다. 오래 지속된 싸움이 인간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음을 나는 안다. 그것이 자유를 위한 투쟁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내 영혼이 증오와 어둠의 바다에서 헤엄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인은 재작년에 발표한 〈열번째 날의 호랑이〉라는 에쎄이에 이렇게 썼다. 지금은 힘든 때다.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 먼저 도와야 할 때다. 팔레스타인의 친구들은 지금부터 다시 영혼을 지키면서 살아갈 길을 찾을 것이다. 나는 지인들과 또 모여 이런저런 목록을 적어본다. 그것들은 가자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한 방안이면서, 우리가 살아남을 자구책이기도 하다. 손가락을 까딱하고, 꿈지럭거리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 누구보다도 한국에 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나는 말버릇처럼 말해왔지만 요즘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 이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지, 더욱 무거워진 회의를 안고서도 꾸역꾸역 하는 수밖에는 없다. 무력의 전지전능함과 홀로 실재함을 당대에 역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이후에도, 우리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 본문은 디지털 창비 논평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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