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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능력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하는 기준은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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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문예출판사가 노동 및 도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미국의 손꼽히는 좌파 지식인 리처드 세넷의 대표작 ‘계급의 숨은 상처’를 출간했다. ‘계급의 숨은 상처’는 1972년 리처드 세넷이 청년 시절에 동료 조너선 코브와 함께 쓴 책으로, 2023년 영미권의 진보 좌파 담론을 선도해온 영국의 버소 출판사에서 새로운 서문을 실어 다시 출간됐다.

보스턴에서 100여 가구를 인터뷰하고 참여 관찰한 세넷과 코브는 기존의 좌파 지식인들이 노동자를 위한다면서도 그들을 물질적 조건에 종속된 존재로만 봤다고 비판하며, 노동자들이 물질적 행복에 대한 계산보다 더 복잡하고 난해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자율과 자립을 상찬하는 미국 문화에서 노동자들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을 강요받으며, 홀로 서지 못한 사람이라는 낙인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물질적 안정만으로는 이러한 노동자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 계급이 경제적 기준뿐 아니라 정서적 자립과 자신감의 기준으로도 나뉜다는 것이 두 사람의 주장이다.

노동 계급은 타인에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능력’을 갖추는 데 몰두한다. 그러나 허들은 많고 문턱은 높다. 자신을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노동 계급은 특권층과 노동자의 양분화에 분노하면서도 두 계급 사이에 무언가 심오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의심한다. 오롯한 ‘개인’으로 거듭나지 못한다는 수치심은 다시금 ‘능력’을 쌓아 올리는 데에만 집중하는 결과를 낳는다.

도달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계속 달리게 하는 파괴적 계급 체계 앞에서 노동 계급의 자아는 분열된다.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일터의 합리성에 자신을 맞춰 때론 인간적 요구를 배반해야 한다. 진짜 자아와 조직을 위해 업무를 수행하는 자아의 분리, 일종의 정신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자아는 계급 체계를 심문하는 일에서 노동자의 관심을 떼어놓고 계급의 숨은 상처를 심화한다.

 

계몽적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잠재적 능력과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이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불러왔다. 모두가 잠재적 능력을 가졌다는 주장은 능력을 펼치지 못한 사람을 자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피어나는 것이다. 이에 세넷과 코브는 능력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하는 기준을 폐기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50여 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이들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능력주의는 전보다 거세게 기승을 부리며,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에 기반한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계급의 숨은 상처가 ‘생존’의 문제가 된 지금, 세계적 거장이 된 노학자가 청년 시절 벼려낸 날카로운 호소력으로 가득한 이 책이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새로운 존엄성의 기준을 질문하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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