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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돼버린 감독 홍상수, 새 경지…영화 '자유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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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 송경호 기자] 홍상수(54)는 걷고 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매번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그 또한 끊임 없이 움직인다. 하지만 홍상수는 그들과 나란히 걷지 않았다. 영화 속 인간의 주변을 돌거나 마주보고 서서 변하지 못 하는 그들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대신 냉소하고, 비웃고, 꾸짖었다. 

그러던 홍상수가 멀리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인간을 바라보며 그들의 처연함과 쓸쓸함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 동정하지 않았다. 동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말하던 인간에 대해 어느새 물음표를 달아 놓기 시작했다. 그때 홍상수는 잠시 멈춰서 걷는 인간에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의 영화를 두고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변하고 있다. 그리고 홍상수는 변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쉼 없이 걷고 있다는 표현은 적확하다. 그리고 '자유의 언덕'에서 홍상수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과 나란히 걷고 있다.

나란히 걷기 때문에, 같은 곳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홍상수의 이야기는 따뜻해진다. 그래서 그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유를 말하게 되고, 그의 영화는 따뜻함과 사랑과 자유를 언급하는 그 순간 동화가 된다. 

"권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는 대사는 동화 속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다. 홍상수는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다시 한 번 열어젖히고 있다.

'모리'(가세 료)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여자 '권'(서영화)을 찾아 한국에 온다. 하지만 권은 없다. 그는 한국에서 보낸 며칠간의 여정을 일기 형식의 편지로 담아 권에게 전한다. 그 편지를 받아본 권은 잠시 어지러움을 느껴 편지를 놓치고,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그 편지는 무작위로 섞인다. 그리고 권은 순서가 뒤죽박죽된 그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시간을 착각하게 하거나 장소를 엇갈리게 만들고 혹은 꿈과 현실을 모호하게 만든 적은 있지만, 홍상수가 시간 순서를 뒤섞은 적은 없었다. '자유의 언덕'에서 홍상수는 모리의 여정을 뒤죽박죽된 편지 그대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 위에 서있는 모리와 주변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삼각형처럼 배치한 뒤 그 가운데 인물이 서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홍상수가 전에 보여준 적이 없다. '옥희의 영화'에서 그는 과거와 현재를 "붙여 놓고 보고 싶었다"고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한 적이 있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갔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이 영화가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순서 없이(순서가 없는 것처럼) 보여주지만 그것이 혼란을 일으키기는커녕 권을 향한 모리의 마음을 어떤 방식보다 더 또렷이 보여준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인간에게, 그리고 언제 만날지 알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다림 밖에 없는 남자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어딘가에 위치했다는 것은 여자를 기다리면서 보낸 그 시간이 있었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시간이 엉키고, 꿈과 현실의 구분이 어려워진다 해도 모리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사랑이 되고, 자유가 된다. '자유의 언덕'은 그래서 동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체험이 된다.

모리가 '영선'(문소리)의 집에 갔다가 화장실에 갇혀 있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화장실에 앉아서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리의 모습에서 감정의 파장이 느껴지는 건 시간에 갇힌 게 아닌 시간 안에 들어간 자의 어떤 평화로움 때문이다. 시간 속으로 들어가기를 자처한 자의 쓸쓸한 안도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30분이나 있었어요"라고 걱정하는 영선에게 모리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유의 언덕'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사랑한다(혹은 I Love You)"라고 말한다. 홍상수는 이제 냉소와 처연함을 넘어 사랑을 말한다. 그것도 시간을 뒤섞고, 꿈과 현실을 뭉개는 특유의 방식으로 말이다. 

홍상수는 이렇게 걷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세계는 언제나 흥미롭다.

저작권자 Ⓒ시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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