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승리 기자] 경기도에 위치한 A사는 혈액순환 개선기, 적외선 조사기 등 헬스케어 기기를 수출하는 업체다. A사는 중국 수출용으로 제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중국에 인증을 신청할 때 먼저 한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중국 정부의 규제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증절차에만 8~9개월이 소요된다. 국내 인증을 거치지 않고 중국의 수입 허가를 받는 제도는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한 수준이다.
의료기기 판매 허가를 갱신하는 경우에도 신규 허가와 거의 유사하게 절차가 복잡하다는 점도 문제다. 국제인증을 받은 제품이더라도 중국에서는 현지 기관에서 필요한 시험을 통과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수반되는 비용 부담도 무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A사 관계자는 "오랫동안 인증을 받다보니 트렌드를 반영한 제품을 판매하기 어렵고, 인증 절차를 밟고 있는 과정 중에 중국 내에서 모방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가 잦아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1990년대 후반부터 자유무역협정(FTA) 확산에 따른 관세 철폐 및 인하 관세가 늘어나면서 자국 산업 보호가 어려워지자 관세 이외의 수단인 비관세 장벽을 강화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비관세장벽은 무역에 저해가 되는 관세 이외의 모든 조치를 의미한다. 기술규제 및 표준, 위생검역조치, 무역구제조치, 통관절차 등이 포함된다. 특히 중국의 기술 장벽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7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이 통보한 기술장벽(TBT:Technical Barriers to Trade) 건수는 총 1599건으로 WTO 창설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 6월말까지 집계된 건수는 861건으로 지난해 통보 건수의 46.2%를 차지하고 있어 올해에도 기술장벽 건수는 예년과 비슷하게 높은 수준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기술장벽의 특징을 보면, 과거와 달리 중국 등 신흥국의 비중이 70%를 초과하고 있으며 사람의 건강 또는 안전 보호 등 주관적인 규제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수출의 26%를 차지하는 제1위 수출시장인 중국의 경우 2001년 WTO 가입 이후 2003년 처음으로 28건의 기술장벽을 통보했다. 2009년에는 201건, 2010년 62건, 2011년 88건, 2012년 75건, 지난해 80건을 통보했다.
중국의 기술장벽 건수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장벽의 특성. 2000년대 초반 중국의 기술장벽은 국제 경제질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국제 표준과의 통일을 목적으로 했으나 최근 중국의 기술장벽은 중국 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중국의 정보기술(IT) 규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2007년 6월 중국 산업정보기술부(MIIT)는 금융관련기업, 통신사, 발전소, 교육기관, 병원 등을 높은 수준의 보안이 필요한 기관(3등급 이상)으로 분류했다. 중국은 해당 기관에 대해 중국산 보안 제품을 사용하도록 하는 MLPS(다중보호계획:Multi-level Protection Scheme) 실시하고 있다.
기관의 보안등급은 시스템 운영자의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중국정부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자국의 IT 산업 발전을 위해 과도한 규제를 하고 있어 외국기업들이 시장 진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높은 수준의 보안이 필요한 기관(3등급 이상)의 사업자 공모에는 MLPS가 적용돼 외국기업들이 민간사업자 공모 참여에서 배제된다. 현재 사업자 공모 시에만 적용 중인 MLPS 규제를 상업분야까지 확대하면 중국에 진출한 정보보안 기업들이 사업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세계 각국은 이 같은 규제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MLPS는 2011년 WTO TBT 위원회에 특정 무역현안으로 상정됐으나 합의 도출에 실패한 바 있다. 또 보안기업 강국인 미국은 미국·중국 통상위원회(JCCT meeting)를 통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중국은 지난해 중반 MLPS 개정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힌 이후 올해 4월까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혜연 무협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원은 "정보보안 제품, 의료기기 외에도 중국 정부의 기술규제가 적용되는 품목이 많다"며 "하지만 우리 측에서는 규제라고 해도 중국 측에서는 규제가 아니라고 반박할 소지가 있어 문제 해결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무역업계는 현장에서 체감하는 기술규제 사례 및 비관세장벽을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정부는 업계와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며 "특히 중국의 기술장벽에 대해서는 아직 진행 중인 한·중 FTA 협상을 통해 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