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이대원(李大源, 1921.5.17-2005.11.20)
공간이 환해지는 그림
“이대원 님의 그림은 보는 이의 가슴속에 밝은 빛을 지핀다. 기분이 우울할 때 이대원의 그림을 바라본다. 원색의 군무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의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이 세상 속에 나의 존재도 하나의 점으로 녹아들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고 있다는 게 기쁘다.
인터넷에 올려진 위의 글처럼 칙칙한 공간에 이대원의 그림을 건다면 순간 환희의 향연장으로 바뀐다. 그림이 그렇게 사람을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대원의 작품만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평생 과수원의 나무와 과실을 붉고 노랗고 파란 색과 점으로 표현해낸 ‘농원’의 화가 이대원. 고도의 미감과 절제된 삶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로 일관했던 이대원은 ‘화단의 신사’,‘사대부 화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등으로 불리며 지난해 11월 20일 생을 마감했다.
보초를 선 두 제자
이대원은 술을 즐겼다. 늘 똑같은 장소(서교호텔)에서 정해진 포도주와 생선회 몇 조각으로 낮시간을 보냈다. 말년 술자리에는 후학인 사진작가 배병우 씨와 한국화가 문봉선 씨가 번갈아 가며 술시중을 들었다. 이들은‘보초’를 섰다고 농담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문봉선 씨는 “99년에 제 전시회에 오셨는데 그림이 좋다며 그렇게 기뻐하셨죠. 그래서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게 됐는데 일주일에 두 번 오전 11시30분부터 짧으면 두 시간 길면 네, 다섯 시간동안 무조건 보초를 섰죠. 신학기가 되면 아예 강의 시간표를 가져오라고 하세요. 강의가 없는 날은 선생님께 불려가는 거죠. 당시엔 참 힘들었는데 거기에서 화단의 이야기나 미술에 대한 철학, 삶의 격조 같은 것을 많이 배우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배병우 씨는 “처음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같은 말 또 하고 야단치고 하니까 다 도망갔고 둘만 남았던 거죠. 그 자리에서 미술판의 패거리를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미술계의 뒷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평소 남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분인데 말년에는 야단도 치시고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현대미술의 동향을 꿰뚫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문화인으로서 상식이 풍부하니까 다 공부가 됐습니다. 그 분만큼 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하고 한국의 민속품을 탁월한 안목으로 수집하고 아끼고 하셨던 분은 해방 이후 없다고 봅니다. 그림 역시 인상파적인 냄새가 나지만 전통적인 문인화나 한국화의 정신이 그림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미술관 건립은 바보 같은 짓이대원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일화를 들어보자.
이대원은 이름 있는 미술인들이 흔히 하는 미술관 건립이나 두꺼운 도록 제작 같은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바보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는 도록대신 지난해 마지막 전시회에 맞춰 『혜화동 70년』이란 책을 남겼다. 그의 엄격한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한 이후 이대원은 후학들의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작품을 구입했다. 이대원만의 후학과 문화를 키우는 방식이었다.
이대원은 바가지를 외국인들에게 자주 선물했다. 가볍고, 한국적이고,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년에는 인사동에서 소방울을 수십 개 구해 옷걸이로 쓰고 있는 배나무에 주렁주렁 매달아놓았다. 마치 나무에 배가 열린 것 같았다. 지인들에게는 어린 시절 소방울 소리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며 하나씩 나눠주곤 했다.
이대원은 부친이 심어놓은 파주의 과수원을 70년간 그 나무 그대로 가꾸었는데, 사과와 배를 매년 친한 사람들에게 꼬박꼬박 보냈다. 한 주유소를 거래하면 일생 그 주유소를 이용하고 한 음식점을 찾으면 늘 그곳을 이용했다.
젊은 시절 반도화랑을 경영했던 이대원은 화가 박수근의 작품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박수근 그림을 좋아했던 외국인들에게 박수근을 대신해서 영문답장을 써준 것은 그였다.
이대원은 통역장교로 근무하는 등 외국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영어와 일어는 유창하게 했고 불어는 60대에, 중국어는 80대에 배운 것이다. 늘 대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대원은 84세까지 중국어 선생을 소개받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불어를 유창하게 못한 것은 좋은 스승을 못 만나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성제대 법과를 2등으로 졸업했던 이대원은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일각에서 ‘시도리(아마투어)’라는 말이 들리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40대에 노수현 화백에 사사했고,『개자원화보』를 교본으로 문인화를 연구하기도 했으며 동서양의 미술을 연구하는 노력을 쉬지 않았다.
일생을 살면서 이대원은 ‘부탁합니다’라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들에게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민예품, 그 중에서도 나무로 만든 골동품을 지극히 좋아했던 이대원은 수집한 것을 한 번도 팔지 않았다. 실생활에서 활용하면서 사랑했을 뿐이다. 그가 처음 구입한 민속품은 강화반닫이 한 쌍으로 1953년에 산 것이다. 골동품을 사면 가장 반듯한 것을 골랐다.
많은 이들이 이대원을 좋아했으나 이대원은 자기식의 사람 가림이 있었다. 화가면 작품이 좋아야 했고 글을 쓰는 사람이면 글이 좋아야 했다. 자기 수준 정도의 교양이 없는 사람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도병으로 끌려가 1935년 3월 동경 폭격을 경험한 이대원은 나흘 동안 시체를 치웠는데 그 이후 세상에 무서움이 없어졌다고 말하곤 했다.
초기작, 한국적인 미학을 담은 명품
이대원의 초기 작품은 탁월하다. 1956년에 그린 가족 그림이나 60년도의‘개나리’,‘나무’,‘담쟁이’61년의‘천정’ 같은 작품은 한국적인 미학을 보여주는 명품이다. 배병우 씨는“초기에 그림을 연구하고 에너지가 있어 작품이 아주 좋은데 많이 남기지 않은 것이 후학들로서는 너무 아쉽습니다. 한국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도를 하다 바로 화려한 회화로 넘어가버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화가들이 초기작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대원도 초기 작품이 참으로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배병우 씨는 이대원에 대해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유니크한 사람입니다. 본인만의 조형의식을 갖고 해방 후 그 어떤 미술사조나 운동과 별개로 자신의 작업을 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색깔을 갖고 있던 지극히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분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글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