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업계에서 이 분 모르면 이상한 겁니다”
개성 출신으로 수원 농대를 나와 공무원생활을 하던 김호영은 1년 선배인 박찬영(현재 화요(火堯) 고문)의 권유로 중앙발효라는 주정공장으로 직장을 옮긴다. 김호영이 술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였다.
이후 박찬영은 풍암발효에서 오래 근무해 부사장에 올랐고 보해양조가 선보인 증류식 소주 ‘옛향’을 개발한 마스터블렌더(master blender, 술 배합사)였다. 김호영은 1961년부터 진로발효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소주 하면 진로’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심어놓은 오감(五感)의 선구자였다.
김호영을 20여년 넘게 스승처럼 모시고 일했던 마스터블렌더 (주)화요의 문세희 전무는 “박찬영, 김호영은 주류업계 사람이나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알죠. 이쪽에서 이 분들을 모르면 그거 이상한 겁니다”라고 기억했다.
1965년 발효된 정부의 양곡관리법은 우리나라 술문화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먹을 양식도 모자라는 판에 무슨 술이냐는 식으로 만들어진 이 법으로 그 동안 쌀로 빚었던 각양각색의 증류 소주의 생산이 금지되었고, 집집마다 내려오던 전통술의 맥이 끊기는 원인이 됐다. 어렸을 때 ‘술 조사’ 나왔다며 허둥대며 술을 숨기곤 하던 기억의 뒤편에는 이런 조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희석식 소주의 개발자
정책이 바뀌자 주류업계는 그동안 생산해 오던 증류식 소주를 포기하고 고구마나 타피오카(고구마류), 당밀 등을 이용해 희석식 소주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원래 희석식 소주는 일본이 대동아전쟁 때 대량 공급을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일본에서 기술을 들여와 처음 시작하다 보니 맛이 없어 맛을 내는 다양한 연구를 하게 된 거죠. 당시 유명했던 술회사가 삼학소주와 진로였는데 삼학소주가 더 앞서 있었어요. 그런데 60년대 후반부터 이것이 역전됐습니다. 그때 김호영이란 분이 있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주정공장에서 생산한 95%의 알코올인 주정을 가져다 물을 섞어 25%, 23%의 소주를 만드는 것으로 이때 마시기 좋게 탈취시키고 첨가물을 넣어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이 기술이다.
“보통 술맛을 보는 것을 관능(官能)검사라고 하는데 관능 능력이 탁월하고 블렌딩 기술이 남보다 앞서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그 날 나온 술을 떠서 한 잔 갔다 드리면 그것을 보고 판정을 하셨어요. 그 분은 술은 11시 이전에 맛을 봐야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가 있다는 철학을 갖고 계셨습니다. 또한 탈취과정에서 술을 깨끗하게 만드는 노하우를 갖고 계셨죠. 가장 중요한 점은 대단한 열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늘 술맛에 대해 개선점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험하면서 고쳐 나갔죠.”
진로의 자회사인 풍원양조의 사장이 된 후에도 일주일에 3일은 제천공장에 내려가 잠자고 곡자실(누룩 만드는 방)에서 밤을 새며 직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정리한 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두꺼비에서 참이슬까지
김호영의 손을 거쳐 만들어낸 대표적인 신상품은 오리지널 진로소주인 ‘두꺼비’와 ‘관광용 소주 디럭스’, ‘참나무통 맑은소주’, ‘참이슬’ 등이다.
희석식 소주가 생산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서민들의 술로 각광을 받아왔던 ‘두꺼비’는 “카”하는 톡 쏘는 맛으로 진로가 확실하게 소주시장에서 승부를 결정지은 작품이었다.
88 서울올림픽을 즈음해 만들었던 ‘디럭스’는 소주의 고급화를 꾀해 저가제품으로 인식되던 그 동안의 소주를 맛과 포장에서 한 단계 높인 것이다.
이어 개발한 것이 ‘참나무통 맑은소주’. “이 술은 오크통에 오래 보관했던 술을 혼합해서 만들었는데 소비자들에게 크게 어필했습니다. 당초 한 달에 10만 상자를 계획했었는데 6개월만에 1백만 상자가 나갔습니다. 이 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브렌딩 기술이었는데 무려 5백번의 실험을 거쳤어요. 증류식 소주나 위스키 냄새가 섞여 있어 일반 소주와 맛이 좀 달랐습니다.”
‘참이슬’은 진로의 개발계획에 참여했던 직원 중 한 명이 다른 곳으로 스카웃되어 회사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기존 계획을 백지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술이다. 김호영은 이때 대나무숯을 쓰자고 제안했다. 1천도 이상에서 굽는 대나무숯을 쓰면 미네랄이 풍부해지고 물이 정화되어 술맛이 좋아지고 해독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이슬’은 대박을 터뜨렸고 진로는 단번에 시장점유율 45%를 차지했다. 진로가 법정관리에 들어가 잠시 30%대로 떨어졌을 뿐 지금은 매출이 더 늘어 54%대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달 생산되는 소주의 양이 2억병 중 1억병 이상이 진로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40년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분”
김호영이 진로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큰지는 진로의 창업자인 장학엽 씨가 잘 대접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진로 역시 그를 잘 대접했다. 공장장과 자회사 사장, 전무를 거쳐 회사를 떠난 뒤에도 다시 고문으로 모셔와 예우했다.
김호영 밑에서 일했던 (주)화요의 문세희 전무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는 열정이었죠. 술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어디가 문제인지 꼭 밝혀야 했고, 그 밝히는 과정도 경험이 많아 다른 사람보다 빨리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서민들의 애환을 달랜 분이라고 하면 맞을 겁니다.”
글 |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