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이 있습니다. 관의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인데요. 두보(杜甫)가 쓰촨성[四川省] 동쪽 깊은 산골로 낙배해 있을 당시 친구의 아들인 소혜가 그곳에 유배돼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시를 지어 보낸데서 나온 말입니다.
<군불견간소혜>란 시에서 두보는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길에 버려진 못을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 뒤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한 섬의 오래된 물은 교룡이 숨기도 한다
장부는 관 뚜껑을 덮어야 모든 일이 결정된다
그대는 아직 늙지 않았거늘
어찌 원망하리 초췌해 있음을… 이라고 위로한 바 있습니다.
센치해지면 눈물짓는 가녀린 심성
지난 7월 타계한 박화목에 대한 에피소드 몇 가지.
60년대 초반 가난한 문화인을 위해 두 집을 잇대어 짓는 방식으로 30여 채 지어진 창작인들이 모여사는 ‘문화촌’에서 박화목은 세상을 뜰 때까지 개조 한 번 하지 않고 살았던 단 한 사람이었다. 동료 문인들이 불편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안타까워 집을 새로 지으라고 독촉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은 가지가지 추억이 얽혀 있는데 어떻게 뜯을 수 있겠나. 마당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중 측백나무는 이사 온 것을 기념해서 심은 것이고, 라일락은 아들을 낳았을 때 심은 것인데 만약 집을 새로 지으려면 저 나무들을 베어내야 할 것 아닌가. 저 나무에는 참새가 와서 지저귀며 놀다 가는데 그것을 베 버리면 참새들은 어디 앉아 놀 것인가. 그러니 난 집을 못 짓겠어.”
술 그 중에서도 맥주를 유난히 좋아했던 박화목은 센치해져서 옛날 생각을 하며 눈물을 짓곤 했다. 특히 하얼빈에서 젊은 시절을 보낼 때 스쳐 지났던 한 여성을 잊지 못했다.그렇다고 그 여성과 무슨 연인도 아니었다고 한다. 술집여자였는데 연인 사이로 발전할 사이도 없이 헤어졌단다. 그러나 정감 있고 따뜻해서 사모할만한 여성이었다며 그녀와 만났던 하얼빈의 강가 풍경을 자주 말하며 애상에 젖곤 했다.
1950년대 한국아동문학회의 창립을 주도해 회장을 맡기도 했던 박화목은 아동문학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다. 집은 사람이 다닐 공간을 제외하면 거의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고 답답해서 박화목은 문인들을 만날 때면 집 앞의 ‘수’다방으로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늘 이렇게 말했다. “이 책들은 내 글도 있지만, 우리 회원들의 글이 실려 있는데 버릴 수는 없잖아.”
‘보리밭’과 ‘과수원길’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폈네 하아얀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쌩끗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옛날의 과수원 길(‘과수원길’)
가곡 ‘보리밭’, 동요 ‘과수원길’의 작사가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박화목의 참모습은 그가 그려낸 동시에 그대로 들어 있다. 순박하고 여리고 예쁜 그 가사처럼 박화목 자신이 그런 성격이었다. 박화목과 절친했던 아동문학가 임원재 씨는 “사랑이 많은 분이었어요. 너무 섬세하고 다정다감하고 삶 자체가 동시처럼 순수했어요. 전혀 속되게 살지 않았고 깔끔했습니다. 아무하고나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동료문인들이 그 분을 어려워했지요”라고 말했다. 아동문학가 김선태 씨는 “그 분이 한국아동문학회 회장으로 계실 때 4년 동안 모셨는데 술을 마셔도 한 번도 음담패설을 하지 않으셨고,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아동문학회 창립 주도
박화목은 청년시절 목사를 꿈꾸며 신학을 공부했다. 평양과 중국 하얼빈, 봉천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1975년에는 한남대 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신학이 바탕에 있었으나 정서는 다분히 자유주의적이고 문학적이었다. 1938년 서정시 ‘가을밤’이 문학평론가 이헌구의 추천을 받고 ,1941년 ‘아이생활’에 ‘피라미드’라는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박화목은 한국아동문학회에 기독교문학회에서 고루 활동을 하며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는 1950년대 탄생한 한국아동문학회의 창립을 주도한 13인의 하나였고 크리스찬문학회를 창립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아동문학회는 우리나라 문학단체에서 맨 처음 출범한 단체로 아동문학가 김영일, 김요섭, 박홍근, 박경종, 장수철 등과 함께 아동문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선태 씨는 “우리나라 아동문학계를 이끌었고 회원들이 활동하도록 안내했습니다. 문인협회에서도 이 어른을 아주 잘 모셨고 이 어른 때문에 아동문학의 위상이 좋았고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아동문학 분과에서 문인협회 부이사장이 나올 정도로 기틀을 잡아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임원재 씨는 “아동문학을 통해 어린이들의 정서를 키우고 어른들의 귀소본능을 동심을 통해 대신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큰 업적이 있다”며 “아동문학계의 원로로 대접받을 만한 분”이라고 말했다.
국민에게 친근한 대표적 서정시인
“박화목 선생이야말로 우리나라 서정시를 대표하는 분입니다. 박목월 시인을 서정시를 대표한다고 하는데 박화목 선생도 그와 쌍벽을 이룰 만큼 국민정서를 나타낸 아주 친근감 있는 분이죠.” 김선태 씨는 박화목을 서정시인의 대표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사실 그의 시가 수많은 노래로 만들어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우리의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정서를 소박하게 표현했기 때문. 음악평론가 민경찬 씨는 “박화목 선생의 가사는 일단 작곡하기에 편하고 형식, 내용, 정서적 측면에서 노래로 만들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말했다. ‘과수원길’과 ‘보리밭’에 가려져 그의 시가 얼마나 많이 노래로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잊고 있다. 민경찬 씨는 “동요집, 가곡집에 그의 시가 굉장히 많습니다. 보리밭을 작곡한 윤용하와 박화목 선생이 친구지간이어서 윤용하를 통해 많은 곡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외에도 ‘도라지꽃’이나 오페라 ‘견우와 직녀’, ‘가을소풍’, ‘고마운 순경’, ‘우리나라 좋은 나라’ 등도 박화목 선생의 시에 곡이 붙여진 것입니다.” 민경찬 씨는 무엇보다 박화목의 가사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가곡 ‘망향’이 음악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곡이라고 설명했다. “원래 ‘망향’은 정지용의 ‘고향’에 곡을 붙인 것인데 정지용 시인이 월북해서 금지곡이 됐습니다. 그래서 박화목 선생의 ‘망향’으로 개사가 된 것인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통절가곡입니다. 그 전까지는 가사가 1,2,3절로 넘어가는 유절가사였는데 이 곡이 처음으로 절로 나뉘지 않는 자유시에 바탕을 두고 씌어진 것입니다.”
순수한 보통 예술인
“방정환 선생 같은 나라 잃고 설움에 차 있는 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은 그런 분은 아니었어요. 타고난 소박한 심성대로 시세계를 열심히 그리다 떠난 평범한 보통문인이라고 할까요.” 한 문인은 그 점이 박화목의 시세계에 일정한 한계가 된다는 고언을 하기도 했다.
글 |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