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만화가의 길을 가고 나이가 비슷한데도 그 양반 뒤꿈치도 못 따라갑니다. 1세기에 나올까 말까하는 천부적인 만화가죠. 다시 그런 사람 못나올 겁니다. 친구였지만 ‘고우영, 고우영’ 하면서 굉장히 존경했고 우리는 늘 ‘고박사’라고 불렀어요. 감히 그 양반 작품을 평하다니요?”
만화가 신문수(66) 화백은 고우영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생전에 못하는 것이 없고 인간성이 좋아 팔방미인으로 통했던 고우영은 국민이 가장 사랑한 만화가였다. 물론 대부분 만화가들에게도 가장 존경하는 선배였다. 1980년 고우영을 포함한 중견 만화가들 10여 명이 낚시를 좋아해서 심수회(心水會)를 만들어 몰려다녔는데 거기서 특히 고우영과 죽이 맞는 친구는 신문수, 이정문(64) 화백이었다. 이들 삼총사는 술계를 만들어 툭하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한 술친구가 아니었다. 마치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의리의 사나이들을 보는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대장암에 걸려 투병중인 고우영을 위로하기 위해 지난해 세 차례 여행을 떠난 것이다.
“4월에는 순천을 거쳐 경주 불국사에 갔는데 난데없이 고박사가 ‘내가 죽기 3개월 전이니 영정사진이나 하나 찍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 즐겁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지고 그 친구를 위로하느라 각자 영정사진을 찍고 찍혔죠.” 신문수 화백은 7월에는 동해 낙산사로 갔던 여행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온몸으로 암이 전이되어 그렇게 울적해하던 그를 위로한 것은 팬들이었어요. 우리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데 사방에서 팬들이 고 화백 아니냐면서 반색을 하고…”
이들의 우정은 고우영의 의리에 기인한 바가 크다. “친구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오는 것이 고박사였어요. 어려운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아 곤경에 처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뛰어나와 애를 써주었는데 그가 나서면 대개 문제가 풀려요.”
고우영의 인간성을 엿보게 하는 일화 하나만 더 소개한다. 결혼을 했던 형과 동생이 요절하는 바람에 졸지에 대식솔을 거느려야 했던 고우영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고 대학교육까지 시켜 고이고이 시집, 장가를 보냈다. 만화수입이 적잖았으나 대식구 때문에 정작 풍족하게 살지도 못했다. 특히 조카딸이 시집갈 때는 ‘고우영의 둘째딸’이라고 청첩장에 박아 돌리며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실었다.
중학생 때부터 만화그리기 시작고우영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았다. 다만 뛰어난 만화가였던 형 고상영이 만화를 그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익혔을 따름이다. 1955년 중학교 때 ‘쥐돌이’로 데뷔한 고우영은 형이 요절하자 형의 만화를 이어받아 ‘추동성’이란 필명으로 만화를 그렸다. 초기작품 중 인기를 끈 것이 ‘짱구박사’. 이정문 화백은 “명랑만화에 충실한 작품으로 익살스럽고 좌충우돌하는 부자의 이야기가 다름 아닌 고박사 자기 집안의 이야기이고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이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후 고우영은 만화방에 공급되는 단행본 만화를 집중적으로 그렸으나 별로 인기가 없었다. 신문수 화백은 “당시 작품도 좋았는데 만화방 수준보다 고박사의 작품 수준이 높아서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고우영이 만화가로 자리를 굳힌 것은 일간신문에 고우영식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 70년대부터이다. 1972년 일간스포츠에 ‘임꺽정’을 발표하기 시작해 ‘수호지’에서 도약하고 , ‘일지매’에서 다듬어졌으며, ‘삼국지’에서 전성기를 맞이해 소위 ‘국민 만화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2만부였던 신문 부수가 고우영의 만화로 4년만에 30만부로 늘어나는 기록을 세웠다. 신문수 화백은 “일간신문에 그런 만화가 실린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전에는 ‘만화’하면 유치해서 신문에 실리면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화이트칼라들이 이런 만화는 실려도 충분하다는 인정을 한 셈이죠. 만화와 일반 독자가 가깝게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천재의 1% 노력
천재라는 말은 여러 가지 요인이 어우러져 빛을 발할 때 일컫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고우영은 천재 자체였다. 신문수 화백은 “재치와 만화적 재주를 가지고 타고난 것은 기본입니다. 고박사의 그림은 아주 정제되어 있고 날카로우면서도 표현이 유치하지 않습니다. 또한 글이 정말 문학적이고 시적입니다. 아마 문학 쪽으로 갔어도 굉장한 문장가나 시인, 소설가가 되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고우영은 어린 시절 이웃집에 살았던 부인 박인희 씨와 연애를 하면서 수많은 연서를 보냈다. 부인이 지금도 고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양이 많음은 물론이고 그 내용이 너무 시적이라는 것이다. 신문수 화백은 “그 때가 열 몇 살 때인데 또박또박한 글씨체에다 문장 자체가 완전한 시여서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료 만화가들도 놀라는 것은 그의 창작에 대한 열의였다. 그는 창작여행을 갈 때면 책을 한 보따리씩 “낑낑”대면서 들고 다녔다. 이정문 화백은 “보통은 그림을 그릴 때 두세 권 정도 참고 도서를 가지고 가는데 고박사는 수많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펼쳐보면서 바늘보다도 가는 연필로 그림을 그립니다”라고 말했다. 신문수 화백은 “중국 역사에 대해 고박사만큼 해박하게 꿰뚫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들춰보며 자기 나름대로 콘티를 짜서 현대 감각에 맞게 표현합니다.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려면 내용을 완전히 꿰뚫어야 하는데 그런 작업에 굉장히 철저했어요‘라고 말했다.
남의 영역에 넘나든 것 후회
고우영은 자신의 일생 일대의 실수로 만화가협회 회장을 한 것과 영화감독을 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90년대 중반 만화가협회 회장을 맡아 연임까지 했는데 정작 자신을 추대했던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자 많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만화가들은 그가 만화를 예술의 한 장르로 끌어올리기 위해 문광부나 예술단체를 찾아 백방으로 뛰었던 노력의 덕을 지금 보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작품 ‘가루지기’를 영화로 만들어 흥행에 실패한 그는 자기의 전문분야가 아닌 곳에 뛰어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신문수 화백은 “삼총사가 돌아가면서 술을 샀는데 고박사는 늘 쩨쩨하게 술을 사다 말아요… 그 점이 유일한 단점으로 떠오르네요”라고 말했다.
글 |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