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승리 기자] 국내 유통 대기업들이 연초부터 대형 인수합병(M&A) 전에 뛰어들면서 기업 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오너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수전을 승리로 이끈 롯데, 하림 등은 기업 주가도 오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면, 오너 부재로 적극적인 대응을 못한 CJ는 고개를 떨궜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지난 18일 KT렌탈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롯데그룹은 2009년 M&A를 본격화한 이후 20여 개 기업 인수에 7조2000억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투여했다.
롯데가 적극적으로 M&A 시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의지 때문이다. 신 회장은 부회장 시절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끝났다"며 부동산 매각을 통한 자금 확보와 함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에 대한 M&A를 본격화했다.
이번 KT렌탈 인수전에서도 신 회장의 승부수가 통했다. 롯데는 1차 본입찰 때만 해도 경쟁자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한 데다 인수 의지를 대외적으로 강하게 나타내지도 않아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롯데는 2차 본입찰에서 인수 가격으로 가장 높은 가격인 1조원 안팎을 제시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업계에서 거론된 적정 가격인 6000억원보다 60~70% 높은 금액이다.
이는 신 회장이 인수전이 과열될 조짐을 보이자 의도적으로 낮은 가격을 제시해 경쟁자들 시선을 돌린 뒤 막판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제 신 회장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반드시 인수하라"며 실무진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CJ그룹은 이재현 회장 부재로 회사가 한 단계 더 클 수 있는 기업 인수 기회를 놓쳤다. CJ대한통운은 지난 13일 마감된 싱가포르 물류기업 APL로지스틱스 본입찰에서 일본 물류기업인 킨테츠월드익스프레스(KWE)에 밀렸다.
KWE는 이번 입찰에서 1조3500억원 가량의 금액을 제시해 인수 가격에서 CJ대한통운을 누른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은행(IB) 업계는 적정 인수가로 10억 달러(약 1조1000억원) 수준을 예상했으나 KWE가 좀 더 공격적인 배팅을 통해 인수 에서 승리했다.
재계는 CJ대한통운이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데 대해 총수 부재에 대한 어려움이 가장 주된 이유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인수전에서는 누가 높은 가격을 써 내느냐가 중요한데 그런 중요한 결정을 때맞춰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너 밖에 없지 않겠나"고 말했다.
실제 CJ그룹 관계자도 "인수·합병(M&A)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가격인데 전문 경영인으로서는 베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결국 엔화 약세로 가격 경쟁력이 강해진 일본기업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데 반해 오너 부재 3년째를 맞은 CJ대한통운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인수전 실패의 주된 이유다.
APL로지스틱스는 기업 부문 물류 쪽에 강점이 있는 회사로 CJ대한통운이 인수전에 승리했다면 회사가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앞서 2013년에도 CJ대한통운은 미국과 인도 물류기업 인수를 검토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지난해 수도권에 구축하려던 물류허브 프로젝트도 무기한 연기했다.
현재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2013년 7월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건강 문제로 치료를 받게 되면서 2년 가까이 총수 부재의 특수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후 이 회장의 외삼촌인 손경식 CJ그룹 회장을 위원장으로 이채욱 CJ주식회사 대표와 김철하 CJ제일제당 공동 대표이사 등 3인 중심의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해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갔지만 인수전 실패는 물론 투자 계획 등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룹경영위원회에 이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들어가 있었지만 지병 등의 이유로 실질적인 경영에는 힘을 쏟지 못하고 있다.
특히 투자나 인수합병에서는 때로는 무모할 정도의 배팅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위협할지라도 과감한 판단을 통해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업 오너가 아닌 이상 전문 경영인 체제로는 보수적인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림 역시 팬오션을 1조80억원에 인수키로 결정함에 따라 재무부담이 발생할 가능성이 컸지만 김홍국 그룹 회장의 결단이 큰 몫을 차지했다. 실제 하림의 통 큰 투자에 대해 업계에서는 하림이 무리수를 뒀다는 지적과 동시에 하림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닭고기 가공업을 주요 사업부문으로 진행했던 하림그룹이 해운업체 인수를 결정한 것은 김 회장이 사업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림그룹은 닭고기 가공업 이외에 곡물 판매 등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하림이 진행하는 곡물 판매 사업은 국내에서 연 매출 1조4000억원 규모다. 팬오션 인수로 해외 곡물 운송과 국내 유통을 일원화해 시너지 효과를 누리겠다는 게 회사 측 전략이다.
김흥국 회장은 "팬오션이 이미 공시를 통해 밝혔지만 총 인수금액은 1조79억5000만원(제3자 배정 유상증자 8500억원, 회사채 1579억5000만원)으로 팬오션이 가진 가치나 잠재력으로 볼 때 결코 높은 금액이 아니다"며 "회생채무를 변제하고 경영이 정상화하면 건실한 우량기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정용진 회장이 이끄는 신세계그룹 역시 올해 유통업계가 경기 침체를 겪고 있지만 전년보다 투자 규모를 50% 늘려 사상 최대치인 3조35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오너가 직접 나서 과감한 투자로 신성장동력 사업 육성에 사활을 걸겠다는 포부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신세계 측에서는 상황에 따라 투자금액은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반면 오너 부재인 CJ그룹은 아직까지도 올해 경영 계획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