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승리 기자] 한화생명이 회계변경을 통해 끌어 올린 보험사 건전성 지표인 '위험기준 자기자본(RBC)' 비율을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연말까지 원 위치 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만기 보유채권을 전량 매도 가능 채권으로 회계상 재분류함으로써 1조1000억대의 평가차익을 뻥튀기(본사 7월27일 보도)한 해당 채권을 연내 시장에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대규모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매물 압박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화생명은 지난 5월 13일 한화생명 본사인 63빌딩 회의실에서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기업설명회(IR)를 개최했다.
참가자들에 따르면 컨퍼런스 콜 방식으로 진행된 이날 IR에서 한화생명측은 1분기 경영실적을 설명한 뒤 올해 말 예상 RBC 수치로 270%를 제시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당시 RBC가 322%에 달하는데 회사 측에서는 올해 말 예상 RBC를 270%라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이는 지난 3월말 채권계정 회계변경으로 원래 270%에서 322%로 52%포인트가 올라간 RBC비율을 다시 원 상태로 회복시키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참석자도 "당시 IR에서 RBC의 원위치 문제는 큰 이슈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50%포인트 내린다고 해서 꽤 큰 하락폭이라고 생각했다"며 "한화생명 측이 구체적 방법까지는 설명하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270%는 한화생명의 지난해 말 기준 RBC비율로, 한화생명은 올해 1분기까지 만기보유채권 전량을 순차적으로 매도가능채권으로 분류해 RBC비율을 322%까지 높였다.
일반적으로 RBC를 끌어 올리려면 자금출연 등이 필요한데, 대주주가 여력이 없을 경우 장부상으로나마 자본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회계 변경을 한다는 것이 금융권의 설명이다. 만기보유채권은 원가로 평가하지만 매도 가능 채권은 시가로 기록돼 평가 차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한화생명이 이렇게 회계 변경으로 만들어낸 평가차액이 1조원이 넘는다
문제는 회계 규정상 '매도 가능'으로 한번 분류된 채권은 최소 2년 동안 '만기보유'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채권 계정 변경으로 높아진 한화생명의 RBC비율 322%가 다시 270%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채권을 팔거나, 채권평가 차액만큼 다른 자금유출이 발생한다는 의미가 된다.
어떤 형태로든 1조원이 다시 빠져 나가야 한다는 말인데, 그 선택지는 두가지 정도다.
첫째, 배당 등을 통한 현금 유출이다. 한화생명은 올해 대주주를 대상으로 1000억원이 넘는 배당을 실시하고 지주사인 (주)한화에 수백억원대의 로열티를 지급키로 하는 등 현금유출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1조원대의 채권 평가차익을 모두 소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다.
이 때문에 결국 금융권은 한화생명이 채권매각에 나선 뒤 확보된 현금을 어딘가에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RBC비율이 50%포인트나 떨어질 정도의 대형 이벤트는 해당 채권이 장부에서 아예 사라지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다.
증권사 관계자는 "기관 투자가들에게 연내에 낮추겠다고 약속한 만큼 이를 실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라며 "대규모 채권이 조만간 순차적으로 시중에 매물로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채권 매각이 핵심 관심사로 부각되자, 한화생명측은 RBC를 270%대로 제시한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나섰다.
회사 관계자는 "증권사 컨퍼런스콜에서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면서도 "RBC를 얼마까지 낮춘다고 밝힌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또 "곧 2분기 실적이 발표되니 322%에서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금융당국은 한화생명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당국은 한화생명의 RBC비율이 권고치인 200%를 웃도는 만큼 금리변동 시 위험에 노출되는 회계변경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한화생명이 이를 강행한 이유에 대해 금융당국 관계자는 "RBC는 회계변경전부터 이미 권고치를 웃돌고 있다"면서 "결국 팔아서 어딘가 쓰겠다는 뜻 아니겠느냐"이라고 전했다.
최대 관심사는 어떤 형태로든 마련될 현금의 '용처'다.
회사측은 부인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한화생명이 현금배당 등을 통해 대주주인 (주)한화 등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관측한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11월 이뤄진 삼성그룹과의 빅딜자금 마련을 위해 최근 차입과 계열사 매각 등을 통한 현금확보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계열사들의 현금창출 능력이 높지 않은데다 은행차입에 나선 그룹 지주사 (주)한화의 부채비율이 170% 수준까지 올라가 있는 등 남은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이 때문에 증권사에서는 "한화의 M&A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현금 배당 능력이 가장 좋은 자회사인 한화생명으로부터 배당금을 많이 받아야 할 것"이라는 리포트가 나오기도 했다.
금융사 관계자는 "한화생명은 지분매각설이 수차례 제기돼도 '사실무근'이라고 딱 잘라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현금 만들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회사"라며 "한화그룹의 캐시카우라는 점이 오히려 무거운 짐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