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냉전이 있었던 전쟁의 세기였다. 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클래식 음악이 지난 세기의 전략적 요소로 사용됐고, 그로 인해 클래식 정전(正典)의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어떻게 클래식 음악이 국가의 상징이자 무기로 쓰이게 되었을까. 어쩌다 음악은 역사의 소용돌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을까.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음악을 통제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감돌던 20세기 초는 예술계의 활력과 다양성이 광증에 가깝게 치닫던 시기였다.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시작된 음악의 폭력 묘사가 푸치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의 폭력성과 선정성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미래파,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수많은 ‘파’와 ‘주의’가 유럽을 뒤덮었다. 음악 또한 이런 흐름에 반응했다. 예상 불가능한 리듬으로 듣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음악, 수 세기 동안 발전시켜온 조성을 버린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바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로 대표되는 음악이었다.
잔인한 전쟁을 겪은 나라들은 국가적 자존감과 정체성을 북돋우기 위한 정책이 필요했다. 그렇게 1차 대전 이후 음악은 정치철학의 대변자라는 역할을 떠안았다. 전쟁의 세기에 등장한 독재자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음악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저들의 체제에 공식적인 음향을 부여할 음악 양식을 콕 집어 요구했다.
히틀러는 기준도 불분명한 ‘퇴폐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작품의 연주를 금지했고, 유대인 작곡가들을 탄압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창작의 범위를 제한했다. 무솔리니는 ‘실험적’인 음악에 재갈을 물렸다. 그로 인해 각자의 조국에서 선풍을 불러일으켰던 많은 작곡가들이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건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네 명의 독일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파울 힌데미트, 쿠르트 바일을 꼽으며, 그들의 음악 인생과 저평가된 작품을 새로이 조명한다.
음악계의 ‘비나치화’ 작업
한편, 엄청난 희생을 낳은 두 번의 전쟁이 끝나고 냉전의 시대에 돌입했다. 음악은 다시 한 번 전장의 선두에서 서게 됐다. 서방 세계는 미국의 주도하에 음악계의 ‘비나치화’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서 ‘아방가르드’를 서방 세계의 대변자로 내세웠다. 새로움과 표현의 자유를 표방한 아방가르드는 국가의 은밀한 지원을 받으며 문화의 전쟁터를 누볐다. 제도권 안으로 완벽하게 흡수된 아방가르드는 20세기 현대음악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아방가르드 노선과 거리를 둔 망명 작곡가들이 미국에서 쓴 작품은 온갖 이유로 평가절하당하고 연주를 꺼리면서 어느 순간 공연장에서 사라지게 됐다.
현대음악은 기부자-평론가-기관의 승인이라는 축복을 받았으나, 이 삼위일체에는 ‘관객’이 빠져 있었다. 현대음악과 감상자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저자는 영화음악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이라는 퍼즐을 맞추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조각이라고 말한다.
할리우드 유성영화를 위한 음악을 쓴 1세대 작곡가들은 히틀러가 불법 음악의 생산자로 위험인물 명단에 올린 ‘퇴폐 음악가들’이기도 했다. 이후 1세대 작곡가들에게 배운 미국 태생의 영화음악 작곡가들은 아름답고 훌륭한 교향악을 썼으나 음악 평론가와 학계의 전문가 집단은 제도권 내의 음악만을 다루며, 이들의 음악을 ‘무비 뮤직’이라는 용어로 깎아내리고 무시했다. 할리우드 음악을 향한 수많은 편견이 이렇게 우리의 인식 속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