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2025.11.06 (목)

  • 구름조금동두천 17.2℃
  • 구름조금강릉 18.7℃
  • 구름조금서울 17.4℃
  • 구름조금대전 17.9℃
  • 맑음대구 18.3℃
  • 맑음울산 19.4℃
  • 맑음광주 20.1℃
  • 맑음부산 21.8℃
  • 구름조금고창 18.4℃
  • 맑음제주 21.5℃
  • 구름조금강화 16.9℃
  • 맑음보은 17.5℃
  • 맑음금산 17.5℃
  • 맑음강진군 21.4℃
  • 맑음경주시 19.5℃
  • 맑음거제 19.0℃
기상청 제공

박웅준의 역사기행

[역사기행] 잃어버린 제국, 가야를 찾아서 ①

URL복사

서울에서 김해로, 첫발에 앞서…가야의 뿔잔(角杯)


“선생님, 최근 가야사가 왜곡될 위험성이 높아졌다는 것 아세요?”

연재를 끝내고, 내 오랜 꿈이자 숙원인 인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까지의 불교미술 전래 대장정을 연구해나갈 참이었다. 

그런 차에 <시사뉴스> 기자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가야사 복원이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전문가를 가장한 자칭 가야사 전문가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이다.

가야사 연구 복원사업이 영·호남의 화합에 도움이 된다는 취지를 대통령이 직접 밝힌 만큼 ‘가야’는 한동안 역사분야의 주요 키워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럴 때 실증적으로 가야를 되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사실 가야의 역사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근 600년간 지속된 오랜 역사를 나라다. 백제, 신라와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소국연합이라는 특성 때문에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 어렵고 기록도 매우 적어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간 고고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가야의 고분이 발굴되어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대 제국(諸國)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가야의 문화를 빨리 확인하고 싶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깝게 가야의 유물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선 가야토기를 살펴봤다. 우리나라의 토기 가운데 가장 조형미가 뛰어나고 곡선이 유려한 가야토기는 이를 제작하던 도공이 일본에 건너가 스에키(須惠器)라는 토기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해, 함안, 창원에서 출토된 굽다리접시의 다리는 알려진 대로 모두 유려한 곡선
을 가지고 있었다. 

시기가 올라가면서 그 형태가 경직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신라의 영향력이 커진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수레모양의 토기, 짚신모양의 토기, 동물모양의 토기 등이 있어 당
시 장송의례(葬送議禮)와 미의식을 엿볼수 있었다.

토기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일명 각배(角杯)라고 하는 뿔잔이었다. 말머리로 끝을 장식한 뿔잔은 부산 동래복천동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가야의 유물로 추정된다. 각배는 짐승의 뿔 모양을 본뜨거나 그 자체를 사용하여 만든 일종의 잔이다. 

서양에서는 리톤(rhyton)으로 불리며 기원전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사용된 술잔으로 동서교역을 통해 동방으로 전파되는데 페르시아(Persia)와 스키타이(Scythia)를 비롯한 유목민족이 주로 사용하였다.

리톤의 끝에는 주로 동물모양을 장식하는데 그 입이나 가슴에서 구멍이 있어 잔을 높이 들고 그 구멍을 통해 나오는 물이나 술을 받아먹는 방식이 특징이다.

가야의 각배는 전체적인 형태와 끝을 말머리로 장식하는 형식은 같지만 그 끝에 구멍이 없어 원래 각배의 의미는 퇴색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각배가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제의적 의미로 사용된 것을 의미한다.

수레바퀴나 기마인물형 토기와 결합된 각배모습의 토기에서 이러한 상징성이 두드러진다. 각배가 서방계통의 유물이고 유목민족이 이를 수용하면서 권력층이 사용한 것을 인식하고 있던 가야에서는 각배를 권력자가 가지는 상징적 위세품(威勢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문제는 금관가야가 이를 어떻게 알고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 형식은 분명하게 중국이 아닌 서방계통 유물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그 표현성에 있어서 화려함이 떨어지지만 직접 보거나 이를 본 사람의 말을 듣고 제작했음에 틀림없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제4대왕인 석탈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탈해가 동구(東邱)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구해오라 하였다. 백의가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먼저 맛보고 드리려 하다가 그 각배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탈해가 이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해 말하기를 ‘이후에는 멀고 가까운 곳을 논할 것 없이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로소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각배가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것과 권력자를 위한 것이라는 함의(含意)를 파악할 수 있다. 석탈해는 신라의 왕이 되지만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출신으로 ‘삼국유사’에는 가락국에 그리고 ‘삼국사기’에 는 금관국 바다에 처음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이 지금 김해인 금관가야였다고 하는 것이 흥미롭다. 신라에도 각배는 있지만 동물장식과 결합된 오리지널에 형식 가까운 각배는 금관가야 무덤에서 발견된 뿔잔이 유일하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 같은 각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실제 유물과 문헌기록을 종합해볼 때 각배는 가야와 신라 모두 해로를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루트는 어디였을까?

각배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인 석탈해 기록에 그가 출생한 다파나국(多婆那國)은 왜국(倭國)이 있는 곳에서 동북으로 1000리라고 되어있다. 그곳이 일본 동북쪽, 인도, 제주도, 대마도라는 등 많은 학설이 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가야와 신라에 유목민의 도래나 그들과의 무역거래가 있었다면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위험은 낮추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동해루트를 주목하고 싶다. 현재 연해주지역은 고대 초원길의 동쪽 끝이었으며 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연해주에서 출발해 김해로 들어가는 가장 용이한 해상루트는 동해 연안을 따라 들어가는 동해루트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해로를 통한 외래문화의 유입은 가야의 초대 왕인 김수로왕(42-199년)의 부인인 허황옥(33-189년)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고 이에 수로왕은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왕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김수로왕릉의 쌍어문과 연관지어서 인도-중국-가야를 연결 짓는 이른바 허황옥루트라는 학설로 이미 유명하다. 근거자료가 부족하여 추론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해로를 통한 외래문화의 유입이라는 점에서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면 화려한 장식을 걷어냈을 때 실체는 드러난다. 가야에는 이밖에도 로만글라스(romanglass)로 알려진 유리잔, 유목민이 사용하는 동복 등 외래계 유물이 발견되었고 신라의 것과 유사한 금관과 장신구 등도 있다. 신라에 비견되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 은 분명하고 앞으로 다각도로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년대가 있는 불상인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539년 고구려에서 조성된 작품이나 신라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불상이 발견된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는 당시 대가야 권역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가야와의 관계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가야와 삼국간의 관계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가야사 복원 정책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가야 이외 지역은 소외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각배를 통해 살펴봤듯 고대(古代)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교류가 활발했다. 때문에 한 국가나 지역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연구도 그 이상 필요하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전공자가 점점 줄고 있는 상황에서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고대사 전반으로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가야의 유적과 유물을 더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짐을 꾸리고 짧지 않은 여정을 시작해야겠다. 서울에서 김해까지가 그 첫발이 될것이다.

저작권자 Ⓒ시사뉴스
제보가 세상을 바꿉니다.
sisa3228@hanmail.net





커버&이슈

더보기

정치

더보기
강훈식 “대통령실 컴퓨터·필기도구도 없었고 무덤 같았다..한국 큰 고비 넘겼지만 위기 여전”
[시사뉴스 이광효 기자]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이재명 대통령 취임 당시 대통령실은 무덤 같았고 지난해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큰 고비는 넘겼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위기와 도전 속에 있음을 밝혔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6일 국회에서 개최된 국회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인사말을 해 “이재명 정부와 대통령비서실은 탄핵이라는 비극 속에서 치러진 선거로 인수위(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없이 맨바닥에서부터 출범했다”며 “취임 당시 당장의 업무에 필요한 필기도구와 컴퓨터는 물론, 직원 한 명 없이 인수인계조차 불가능했던 대퉁령실은 실로 무덤 같았다”고 말했다. 강훈식 비서실장은 “전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오로지 민생, 경제, 사회, 외교, 안보 등 국가의 모든 영역에 걸쳐 겹겹이 쌓인 복합위기였다”며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발생한 내란과 불법계엄으로 민생경제는 무너졌고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향해 있었으며 사회 전반에는 깊은 갈등의 골이 생겼다”고 밝혔다. 이어 “강경 일변도의 대북 정책과 대화 단절로 남북관계는 극단적으로 악화돼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고 외교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어 국익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며 “지난해 벌어진 불법 계엄 사태로 인한 큰 고비는 넘


사회

더보기
서울시의회 ‘문화재 보호조례 개정’ 관련 대법 소송서 승소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서울시의회는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 조례 일부개정 조례안’에 대해 문화체육부장관이 제기한 의결 무효확인 소송에서, 대법원이 6일 조례안 의결이 유효하다고 서울시의회에 승소판결을 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1부가 서울시의회의 ‘서울시 문화재 보호조례’ 개정이 문화재보호법 등을 위배하지 않았다고 판단함에 따라, 서울시의회가 지난해 5월 제정한 ‘서울시 국가유산 보존 및 활용에 관한 조례’는 최종적으로 유효하게 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국가지정유산 100m이내)을 벗어난 곳에 대한 규제가 사라지게 됐다. 문화재보호조례는 24년 5월 폐지되고 ‘서울특별시 국가유산 보존 및 활용에 관한 조례’로 대체 입법된 바 있다. 서울시의회는 23년 9월 본회의에서 김규남 의원이 대표발의 한 문화재 보호조례 개정안을 가결했다. 서울시의회는 문화재 보호조례 제19조제5항이 상위법인 문화재보호법의 위임이 없는데도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바깥에 대해서도 포괄적·추상적 규제를 가능하도록 한 것은, 문화재 보호와 시민의 삶이 공존·상생하는 도시 환경을 저해하는 과잉 규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서울시의회가 통과시킨 이 조례안을 서울시장이 23년 10월 공포하자, 문화체육관

문화

더보기

오피니언

더보기
【박성태 칼럼】 진짜 부동산 대책은 ‘가만 놔두는 것’이다
정부가 또다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언제나처럼 ‘부동산 시장 안정’과 ‘투기 근절’이다. 하지만 이번 10‧15 부동산 대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과연 이것이 시장 안정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시장 자체를 마비시키려는 것인지 의구심을 금할 수 없다. 이번 대책의 핵심 논리는 ‘풍선 효과’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강남 3구 집값이 오르니, 그 불길이 번진 마포·용산·성동구를 잡고, 나아가 서울 전역을 조정대상지역이라는 족쇄로 묶어버렸다. 과천과 분당이 들썩이자, 그와는 무관한 인근 경기도 12개 지역까지 모조리 규제지역으로 편입시켰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짚은 ‘연좌제식 규제’이자 ‘과잉 대응’이다. 첫째, 특정 지역의 가격 상승은 그 지역 나름의 복합적인 수요 공급 논리에 따라 발생한다. 강남의 가격 상승 논리와 서울 외곽 지역의 논리는 엄연히 다르다. 단지 행정구역이 ‘서울’ ‘수도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지역에 동일한 대출 규제(LTV, DTI), 세금 중과, 청약 제한을 가하는 것은, 빈대 몇 마리를 잡겠다며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다. 둘째, 이러한 전방위적 규제는 ‘현금 부자’가 아닌 평범한 실수요자와 선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