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황금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이 저물고 있다.
이맘 때면 한 해 동안 거둔 성과와 결실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에 희망을 품게 마련이지만, 올 연말은 미래를 이야기하기에 당장 닥쳐 있는 현실이 녹록치 않다.
특히, 농업·농촌의 현실이 그렇다.
올해는 양파, 마늘 등 주요 채소류 가격이 연중 약세를 보였는가 하면, 아프리카돼지열병(ASF)과 통상 관련 이슈들까지 겹치는 등 혹독한 악재가 겹쳤다.
이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가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올 한 해 우리 농정의 최대 불안 요소로 떠오른 이슈는 정부가 내린 농업 부문의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선언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0월 정부서울청사에서 “미래에 WTO협상이 전개될 경우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가 1995년 WTO에 가입한 지 24년 만이다.
농업계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부 말대로 당장은 영향은 없을지 몰라도 향후 타결될 농업협상을 통해 농업 분야가 엄청난 타격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협상 결과에 따라 농업보조금과 주요 농축산물의 관세를 대폭 깎을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렇다.
농민들이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상농성을 하며 "개도국 지위 포기는 농업 포기와 다름없다. 식량자급률은 최저, 도농간 소득격차는 최대로 벌어져 있는 현실에서 방패막이인 개도국 지위까지 포기하면 농업은 회생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라며 정부의 개도국 지위 포기 결정 철회를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 1995년만 해도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소득 대비 95.1%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2018년엔 도시근로자의 65%에도 못 미쳤다.
그간 정부의 다양한 지원에도 오히려 농가소득은 계속 뒷걸음질쳐 온 것이다.
설상가상 11월엔 태국 방콕에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타결됐다는 소식마저 날아왔다.
RCEP은 아세안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현재까지 RCEP협상에서 회원국간 논의되는 농산물의 양허(관세 인하철폐) 수준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체결된 FTA 이상으로 양허 수준이 결정된다면 농업 분야가 피해를 입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농축산물 수입에서 RCEP 회원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데, 이들 국가들이 낮아진 관세를 무기로 국내 시장을 장악해나갈 것은 시간문제다.
이런 두 가지 이슈가 우리 농업·농촌에 더욱 큰 위기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불확실성 때문이다.
WTO 개도국 지위 관련 협상이 언제 이뤄질지 모른다.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당장 몇 년 후일 수도 있다.
RCEP의 농산물 양허 협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금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세계 무역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늦기 전에 농업 정책의 대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지금의 상황을 위기로만 규정하지 않고 농업·농촌이 발전할 기회로 삼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업예산 확대다. 예산은 모든 정책 추진의 원동력이다.
국회는 지난 10일 15조7,743억 원 규모의 2020년 농업예산을 확정했다.
올해보다 7.6%(1조1,147억 원)나 늘었다. 단순히 증가율만 놓고 보면 최근 10년간 2012년 3.7%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슈퍼예산으로 편성된 내년도 전체 국가예산 512조3,000억 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1%에 불과해 초라한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수준의 농업예산으로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농정을 펼치기엔 역부족이다.
농업계가 줄곧 농업예산을 국가 전체 예산의 4% 이상으로 편성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불어 FTA 등으로 수혜를 보는 대기업들로부터 이익의 일정액을 세금 형식으로 거둬 농업계를 지원하는 무역이득공유제와 미국의 가격손실보상제도(PLC)같이 농업의 가격리스크를 완충하는 가격변동대응직불제 도입, 농가소득 안정과 식량주권 확보, 농업의 공익적 기능 유지, 지방 소멸 방지, 지속가능한 성장 등을 위해 농업의 경쟁력을 높일 대책도 서둘러 세워야 한다.
지금이야 그렇지 만약 주식인 쌀을 비롯한 식량자급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농산물 수입국으로 전락했을 때 수출국들이 식량을 무기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동차나 휴대폰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생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끼니를 거르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더 늦기 전에 정부와 국민, 사회가 농업·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모두 되새겨야 할 때다.
농업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황금돼지꿈도 꿀 수 있다.
■ 이성희 1971~1997 경기 낙생농협 입사, 상무, 전무 역임 1998~2008 낙생농협 조합장(3선) 2003~2010 농협중앙회 이사(2선) 2008~2015 농협중앙회 감사위원장(3선) 2016 23대 농협중앙회장선거 출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