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 후 대학 선생이 되어 보겠다고 진학한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까지 나는 주류로 살았다. ‘뺑뺑이’로 입학한 고교 시절에도 입학 성적이 좋았기에 당당했다.
대학원 때 학비 보조를 받기 위해 학과 사무실 조교를 한 일이 있다. 나처럼 본과 출신이 아닌 타과, 심지어 타대 출신은 근로장학금과 연계된 사무조교 자리조차 얻기 어려웠다.
나는 교수 연구실 조교 ‘낙점’이야 연구실의 ‘주인’인 교수가 하지만 사무조교만큼은 차별 없이 희망자에게 고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타과 출신 여학생, 타대 출신 여학생과 셋이 교대근무를 했다.
석사학위 논문을 썼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사용한 커뮤니케이션학의 토착화하는 용어에 대해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도교수가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논문심사 주심을 맡은 그는 논문 발표회장에서 학문의 세계엔 일반화밖에 없다고 코멘트했다. 나는 논문을 인쇄할 때 토착화를 한국적 적응이라고 고쳐야 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않고 취직하겠다는 나를 말리는 선후배들에게 나는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에게 계급장 떼고 얘기해 보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은사와는 안 되더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나이로 서른에 중앙일보에 특채로 입사했다. 신문사 앞엔 우리 회사 사람들이 자주 찾던 '남강'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밤이면 여기서 다른 부문 선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수시로 합석을 했다.
한번은 새카만 신입이 까불까불하자 공채 1기였던 대선배가 물었다.
"너 몇 기생이니?"
“저는 기생이 아니라 회사와 공생합니다.”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대선배는 기가 찼는지 웃었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애주가에 호방하면서도 너그러운 분이었다.
신문사 시절 난 비주류였다. 공정보도위원회 간사로 있는 동안 시사지 부문으로 사실상 방출됐다. 차장 때 부장급 보직인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이 됐지만 최단명에 그쳤다.
취업 전 주류이던 시절 나는 용광로처럼 주류는 비주류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철을 만드는 고로엔 철광석과 더불어 연료인 코크스를 넣는다. 고온에서 녹은 철광석에서는 선철이 나온다. 주류와 비주류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비주류이던 신문사 시절 나는 조직 논리에 순응하지 못했다.
"젊어서 진보 아니면 가슴이 없는 거고, 나이 먹고도 보수가 안 되면 머리가 없는 것"이란 말이 있다.
이 잣대를 들이댄다면 난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난 나이가 들면 오히려 진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적 삶은 이 시대의 대세인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저항하는 것이다.
사실 젊어서는 생존을 위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체제에 적응하고 이들이 만든 잣대에 맞춰 살아야 한다. 성공하려면 세상과 조직이 원하는 대로 처신해야 한다. 그렇게 사느라 때로는 부끄러워 나는 하늘을 우러르기는커녕 짐짓 외면했다.
그런데 6년여 전 정년퇴직하고 나서 조직 논리에서 자유로워졌다. 여전히 ‘배운 도둑질’을 하지만 내가 종사하는 언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나이를 먹으니 성공은 더 이상 인생의 목표도 아니다.
나이 들어 보수화하는 건 사실 기득권 때문이다. ‘딸깍발이’ 기자로 살다 보니 사실 이렇다 할 기득권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양극화된 세상을 꿈꾸지 않았다. 이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려면 지금의 기득권적 사고와 행동 원칙을 바꿔야 한다. 세상은 결코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 저절로 좋아지는 법은 없다.
◆이필재는…
‘58년 개띠’로 서울서 태어났다. ‘뺑뺑이’ 1회로 고등학교에 진학,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한 후 중앙일보에 들어갔다. 정년퇴직 후 ‘배운 도둑질’을 하는 한편 이런저런 강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