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 러시아를 뒤흔든 혁명적 걸작이 서울에 왔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미술의 혁명’을 일으킨 아방가르드 작품들이 2021년 12월 31일부터 2022년 4월 1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 2관에서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전>이라는 이름으로 열린다.
한·러 수교 3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서유럽 중심으로 짜여져 왔던 근대미술의 지평을 러시아를 포함한 비서구권으로 확대하는 주요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장에는 피카소, 마티스와 비교되는 20세기 주요 추상미술 작가인 바실리 칸딘스키를 비롯, 카지미르 말레비치,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 미하일 라리오노프, 나탈리야 곤차로바 등 49명 작가의 작품 75점이 걸려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붉은 방의 초입에서 예술혁명의 기조를 알리는 붉은 여덟 마리의 말을 만나게 된다. 이 말들이 방의 색채처럼 붉디붉은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을 향해 내달리는 힘찬 기운을 내뿜는데 반해, 라리오노프의 비너스는 풍만하고 위풍당당한 자태로 조명아래 포즈를 취하며 느긋하고 나른한 시선으로 관람객을 맞이 한다.
곤찰롭스키의 시선으로 포착된 화가 바실리 로즈데스트벤스키의 애견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람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가 러시아 활동 시기에 남긴 ‘즉흥’ 시리즈,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대표작을 포함해 입체-미래주의 경향의 작품들도 선보였다.
현대 사진예술과 광고디자인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대형 회화작품은 전시의 백미를 이룬다. 이들 작품들은 10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 생명력으로 관람객과의 소통을 기다리고 있다. 이외에도 ‘광선주의’와 ‘신원시주의’로 유명한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작품들도 소개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스탈린 집권 이후 퇴폐미술로 낙인 찍혀 종식을 고했다. 그리고 동서 이념 대립과 냉전에 의해 세워진 철의 장막 속에 60년 이상 가려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현재는 20세기 현대미술, 건축, 디자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 경향으로 평가된다.
지난 2018년 영국 왕립예술원(Royal Academy of Arts)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규모 전시들이 개최되었다. 이에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제한되어 있던 ‘유럽모더니즘 미술’에 대응하는 ‘비서구권 아방가르드 미술’의 국내 소개의 필요성도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한·러수교 30주년이라는 시기적 기점을 맞이하여 본 전시가 기획되었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거장전들이 해외에서 기획된 전시를 그대로 가져와 전시하는 기존의 관행과 달리 이번 전시는 김영호 예술감독 휘하 국내 러시아 미술전문가와 전시기획전문가들이 발로 뛰어 직접 기획한 전시여서 더욱 의미가 깊다.
전시된 작품들은 러시아의 국립미술관인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의 소장품이 중심을 이룬다. 아울러 크라스노야르스크 미술관, 니즈니 노브고로드 미술관, 연해주 미술관 등에서도 보내 왔는데 모두 러시아 연방 문화부에 문화재로 등록 관리되고 있는 국보급 작품들이다.


작품들은 지난해 12월 20일 대한항공을 통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미술품 전용 운송 무진동 차량으로 미술관 수장고에 반입되었으며, 12월 26일 러시아 미술관 측 호송인 2인이 도착하면서 전시를 위한 작품 컨디션 체크 작업을 마쳤다.
컨디션 체크는 작품이 반입될 때와 나갈 때 처음과 마지막의 상태를 점검해서 작품의 상태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작업이다. 확인을 마친 작품들은 이제 벽에 걸리고 관람객을 맞이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 구랍 31일 전시의 막을 열었다.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피카소, 마티스와 비교되는 20세기 주요 예술가이자 이론가이다. 최초의 현대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어냈다. '즉흥' '인상' '구성' 등 시리로 유명하다.
칸딘스키와 함께 소개되는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절대주의 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의 효시로 중요성을 갖는다. 그의 절대주의 초기작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은 극히 소수에 불과해서 이번 전시작 역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번 출품작 중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대표작을 포함해 입체-미래주의 경향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관람객의 전시 이해와 참여를 위해 작은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어린이를 동반한 관람객을 위한 체험활동지가 제공되는가하면, 관람객들에게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주요 작가그룹이었던 ‘다이아몬드 잭’을 연상시키는 트럼프카드 모양의 미션카드가 주어진다. 관객들은 제시된 미션을 풀어보며 전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이번 전시는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관람객의 자유로운 작품촬영이 허용될 수 있도록 계약 되었다. 하여 관객들은 포토프레임 카드 등을 활용해 자신만의 추억사진을 남길 수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오디오 가이드는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의 배우 이제훈이 맡았다.
전시 예술감독을 맡은 중앙대학교 김영호 교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퇴폐 예술로 낙인이 찍혔으나 50년 뒤에 미니멀아트로 부활한 역설적 창조의 예술 이었다”며 “1910~20년대 러시아의 전위적 예술운동은 한국의 추상미술과 단색화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에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아울러 “20세기 초 전쟁과 혁명의 변혁기를 살았던 예술가들이 어떻게 현실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동참했는지를 살펴보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전시의 의의를 밝혔다.
황규진 큐레이터는 지금은 미술사 속의 거장들이지만 한때 이들은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 예술가들이었다며 “예술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열정을 만나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