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작전을 하던 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되는 사건이 다시 밝혀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아래 진실화해위)가 '전남지역(화순·담양·장성·영광) 11사단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전남 화순군, 담양군, 장성군, 영광군 일대에서 수복 및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11사단 군인에 의해 수백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된 사실을 규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육군본부의 <한국전쟁사료(1, 21, 59)>, 미8군 작전국의 <미8군정기작전보고(3∼6)> 등 사건과 관련한 자료조사와 생존자, 목격자를 비롯해 당시 참전군인 등 참고인의 진술조사, 현장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재 여부와 희생규모를 밝혔다.
특히 <한국전쟁사료>에 나타난 당시 11사단의 이동 및 교전상황, 전과(戰果) 등 관련 기록과 생존자, 목격자 등이 진술하고 있는 사건의 발생 시기와 장소, 희생경위를 비교해보면 대부분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이 발발하고 낙동강까지 밀리던 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28 서울수복 뒤 국군 11사단은 경남·전북·전남지역에 대한 수복에 나섰으며, 퇴로가 끊긴 인민군 및 지방좌익이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후방교란작전을 펼치자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을 도입해 빨치산 토벌을 벌였다.
그러나 국군 11사단은 빨치산과 민간인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작전 중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공비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빨치산의 은신과 식량공급원이 될 수 있는 산간마을을 소각하고 민간인을 면소재지나 수복지역으로 소개시켰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 혹은 부역혐의자 등으로 몰린 담양·장성·화순·영광지역 민간인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11사단 20연대와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거나 연행된 뒤 행방불명됐다.
국군 20연대와 9연대 군인들은 미수복 지역 주민들을 빨치산과 동일시하거나 협력자로 간주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살해하는가 하면, 인민군 점령기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주민들을 사살하는 등 법적 기준이나 근거 없이 민간인 살해를 일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을에 진입한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피난을 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을 끌어낸 뒤 이중 부역혐의자 가족들과 청장년 등을 선별해 사살했으며, 미처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맹인 등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불에 타 숨지기도 했다.
특히, 장성군 황룡면 통안리 등지에서는 빨치산과 교전 중 군인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주민들을 인근 야산이나 마을 공터에 모아 놓고 빨치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사살하고, 수 차례에 걸쳐 확인사살까지 거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군인들은 빨치산과 부역자 색출의 편의를 위해 인민군복으로 위장한 채 마을에 진주한 경우도 있었음. 작전에 참여한 한 사병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탄약이 부족해 함부로 사격할 수 없었다"며 "고의로 인민군복으로 위장해 빨치산과 부역자를 유인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라고 진술함
그런 와중에서도, 화순군 남면에서는 가옥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방 안의 주민들에게 눈짓을 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해 살상을 피할 수 있었으며, 화순군 도암면에서도 중학생 신분을 확인하고 살려준 경우가 있어 일부 군인들이 사살을 앞둔 급박한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해 애꿎은 희생을 막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11사단 군인들이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모두 공비이거나 통비분자라며 죽여야 된다'는 지휘관의 명령과 사전교육에 따라 작전지역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당시 20연대 1대대에서 복무했던 한 사병은 "애교떠는 예쁜 여자는 적이다. 곧 권총으로 쏠 것이고, 안 죽이면 내가 죽는다"라는 교육을 받았으며, "도망가는 사람들은 일단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사격했다"라고 진술함
진실화해위는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291명이었으나 일가족이 몰살됐거나 유족이 타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이는 최소한의 희생자 수로 판단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화순 103명, 담양 94명, 장성 67명, 영광·함평에서 27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
주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갔던 20∼40대 남성들이 많이 희생됐으며, 장애인과 임산부를 포함해 여성·어린이·노인 등 노약자가 전체 희생자의 34.7%에 달했다.
희생자들은 군사요원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지 신체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었다.
진실화해위는 "비록, 사건발생 당시 전시수복 과정의 혼란한때였다고 하더라도, 국군이 적법 절차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 한 것은 국민의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며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전원을 몰살하거나 장애인과 노인을 살해한 행위는 인도주의에 반한 야만적행위이며 명백한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대해 공식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및 군인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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