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문에서 유명 작가가 여럿 나오기는 쉽지 않다.
국내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작가 윤석남(85)과 조각가 윤석구(77)는 한 뿌리에서 나고 자라난 남매 예술가다. 윤석남이 여성사를 발굴해 여성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작업을 해왔다면, 윤석구는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를 성찰하고 생명에 애정을 보이는 작업을 해왔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윤석남 윤석구의 2인전 ‘뉴라이프 New Life’전은 두 남매가 함께 여는 첫전시다. 윤석남은 2000년대 초반 그린 드로잉 80여 점을, 윤석구는 미발표 신작 17점을 내놓았다.
두 사람이 미술로 함께 한 것은 2012년 전북 익산국제돌문화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한 조각이 유일하다. 이번 전시는 동생 윤석구의 조각 작품을 중심으로 윤석남의 2000년대 드로잉을 소개한다.
#윤석구, 물질적 욕망 부추기는 자본주의 비판
“살아가면서 하나의 틀에서 출발하는데, 이러한 틀을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치유와 새 생명 탄생의 의미를 담은 작품을 하게 됐습니다.”
윤석구는 15년 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원광대학 미술대학에서 제자를 기르고 작업을 하면서 숙명적인 틀을 느꼈다고 한다.
“비슷한 작업을 계속 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윤석구는 버려진 사물 또는 기존 작품에 다채로운 천을 콜라주해 새 작품으로 만들었다. 대형 바나나를 비롯해, 실제보다 크게 작품화한 과일과 채소는 현대의 유전자 조작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또 벌목하는 이들이 반듯한 나무만 가져가고 비뚤어진 나무는 버리는 모습을 보며 버려진 나무를 주워 작업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굽은 나무들이 오히려 조형적인 느낌이 들어 좋았다”는 그는 “버려진 대상을 바라보며 그동안 우리에게 준 혜택을 생각하고 그들의 상처를 천으로 감싸 치유하고 새 생명체로 탄생시키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생각은 정년 퇴임 후 아파트 주변에서 만난 물건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버려진 아이 자동차와 자전거를 재탄생시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안맨‘의 모습을 한 남성 모형에도 천조각을 붙인 ‘A New Life’, 과도한 외형미에 대한 풍자를 보여주는 듯한 뚱뚱한 배와 처진 가슴, 작은 키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대형 과일 등에 새 생명을 부여했다.
평론가 이진명씨는 “대형 과일과 채소에 인공적인 색을 칠해 자연의 변종과 신품종 개량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물질적 욕망을 추동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했다”고 평했다.
#윤석남, 드로잉으로 가슴 속 응어리 풀어내
한국 페미니즘 미술을 개척해온 윤석남은 이번에는 동생 뒤에 섰다. 그동안 여성 인물을 그린 조각과 설치작업을 주로 보였다면, 이번에는 2000~2003년 그린 드로잉만 선별했다. 작품 하나하나 보는 재미와 감동이 쏠쏠하다.
“1995년부터 2000년대초까지 아이디어가 고갈됐다는 생각이 들어 드로잉을 시작했어요. 낙서처럼 시작했지만 생각나는 대로 하루에 10장씩 계속 그리다보니, 너무 재미있고 가슴 속 응어리도 풀리더군요.”
전시된 드로잉 속 여성들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딸, 작가 자신이 중심이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를 촬영한 감독이자 문필가였던 아버지 윤백남은 1954년 유산을 거의 남기지 않고 병사했다. 이후 39세의 전업주부였던 어머니 원정숙은 6남매의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끌었다.
윤석남은 드로잉과 글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깊은 존경심을 절절하게 담아냈다. 작품에 어머니를 기억하며 ‘윤원석남’이라고도 썼다.
한편 힘든 현실에서 떨어져 살고 싶은 작가의 마음도 내비췄다. 그 마음은 그네를 탄 자화상으로 그려졌다.
“화가는 지상으로부터 20!30cm 떠 있어야 되지 않을까.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도 안 되고 현실에 파묻혀서도 안되는 중간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학고재에서 만난 윤석남 윤석구 남매에게 서로에 대해 물었다.
“누나는 제게 미술적인 영향을 많이 주신 분이에요. 초등학교 때 누나가 인상파 화가의 화집을 많이 보여줘서 그림에 애정이 많이 싹텄죠. 나도 미술을 전공했고, 누님도 미술을 하니 가족중에서는 제일 친밀해요.”(윤석구)
“동생은 저와 제일 친했어요. 3남3녀 중 제가 둘째이고, 동생이 막내인데 제일 사랑하는 동생이에요.”(윤석남)
누나와 동생은 경기도 화성의 한 작업실에서 각각 창작 활동을 한다. 원광대학교 퇴직 후 경기도에서 작업하던 동생을 누나가 화성 작업실의 한쪽으로 초대했다.
동생을 아낀 누나의 마음은 작품 설치에서도 보인다. 동생의 작품들이 전면에 나선 반면, 누나의 드로잉들은 동생을 응원이라도 하듯 뒤로 물러나 있다. 전시는 2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