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서정주 ‘푸르른 날’)
김선두는 전통기법을 바탕으로 한국화의 창조적 계승에 천착해왔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을 연기한 최민식의 대필을 하며 장승업의 아름다운 그림을 재현했던 그는, 현대적 감각으로 한국화를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다. 일본, 중국의 채색화와는 차별화되는 ‘장지기법’으로 현대한국화의 패러다임 전환을 지속적으로 선도해왔다.
“작가 데뷔 이후 ‘한국화가 현대회화로서 가능할까’를 늘 가슴에 품고 작업해왔다”는 그는 장지 위에 색을 중첩해 우려내는 ‘낡은 방식으로 새롭게 이야기하기’와 ‘우리만의 미감을 새로운 미디어로 풀어보기’라는 두가지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서울 삼청로 학고재에서 열고 있는 개인전 ‘푸르른 날’은 서정주의 ‘푸르른 날’ 시에서 영감을 받아 정한 전시 제목이다. ‘낡은 방식’으로 새롭게 이야기하는 4년만의 개인전이다. ‘낡은 방식’이란 전통적인 한국화 방식을 말한다. 이번 출품작에서는 장지에 분채를 여러번 칠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색을 우려냈다.
장지는 촘촘하고 두껍기 때문에 수십 차례 채색해도 색을 포용할 수 있다. 물감을 머금은 장지에는 색이 투명하고 짙게 발색된다. 채색을 얹어 지우고 더하는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하여 작품에 깊이감을 더한다. 또 작품의 구성도 다채로워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 풍경을 담은 ‘On the Way in Midnight’(2024), ‘낮별’(2021-2024), ‘지지 않는 꽃’(2024) 연작 외에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나 시인 등의 인물을 그린 ‘아름다운 시절’(2021-2024) 연작을 포함해 총 36점의 신작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다양한 소재를 통해 ‘삶의 절정’을 표현하고 있다. 서정주의 시에서 가져온 ‘푸르른 날’이라는 전시명도 ‘삶의 절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잘 표현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절정’을 설정해두면서 살아가죠. 그렇지만 ‘삶의 절정’은 그냥 꿈이나 욕망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허망한 허구죠. 하지만 설정해두고 살지 않으면 삶의 에너지도 생기지 않고 무기력해지니 그리하고 살아간다고 봐야겠죠.”
이번 전시에서 전시 주제를 함축하는 작품은 가로 8m 크기의 ‘싱그러운 폭죽’이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이 작품은 꽃을 ‘땅이 쏘아 올리는 폭죽’으로 생각한 작가가 폭죽이 터지는 절정의 순간을 꽃망울이 피면서 꽃가루가 휘날리는 모습에 빗대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폭죽의 불꽃은 한시적으로 존재하고, 그 이후로는 소멸된다는 점에서 우리네 삶과 닮았다”고 말하다. 삶의 일시적인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폭죽을 선택했다고 한다. 작가는 우리가 꿈꾸고 목표로 삼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그 목표에 도달한 뒤 사라져 버리는 공허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폭죽이 터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면서 동시에 인생의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감정적 여운을 보여준다.
전시장에 걸린 자연 소재 작품들은 모두 삶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담고 있다. 별과 별자리를 배경으로 곤줄박이 같은 새가 과자 봉지 같은 먹을 것을 쳐다보고 있는 ‘낮별’ 연작에서는 먹을 것을 바라보는 새를 통해 욕망을 좇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낮에는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별을 통해 현상에 가려 보이지 않는 본질을 이야기한다.
보름달이 뜬 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어두운 길을 홀로 걷는 사람을 그린 ‘밤길’ 연작은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 내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듯한 달처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존재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한다.
초상화 연작 ‘아름다운 시절’도 눈에 띈다. 상단에는 시인 김수영, 야구선수 선동열, 웹툰 작가 이말년(침착맨), 시인 곽효환, 무술가 배우 이소룡 등 초상 그림을, 그 밑에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알파벳 아래 해당 인물의 일정을 반복해서 쓰고 지우는 방식으로 적은 작품이다.
유한한 시간 속 찬란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과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환기시킨다.
#한국화의 패러다임 바꾸기 위한 노력
김선두는 2018년 포스코미술관 개인전부터 달라진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실험적인 그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화면 속에 다양한 이미지 구성을 했다는 점, 고운 분채 가루를 수십번 발라 화사한 색감을 낸 점 등이 눈에 띈다. 이전의 작품들이 정서적인 필선 위주의 수묵 작업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분채를 수십번 발라 깊은 맛이 나는 색감을 낸 점, 또 한 화면 속 이미지 구성을 위해 소재를 다채롭게 한 점 등이 눈에 띈다.
“앤디 워홀 이후 현대미술의 게임 방식이 ‘이미지 구성’에 있었죠. 우리의 수묵화가 타파해야할 장르가 아니라 현대 회화의 블루오션임을 보여주기 위해 현대미술의 ‘이미지 구성’ 게임 방식을 차용했습니다.”
김선두는 한국화가 얼마나 현대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한국화란 명칭만 있고, 실체가 없습니다. ‘한국화’를 ‘전통회화’라고 단정하고 구석에 제껴놓는 것에 너무 화가 나서 ‘그렇지 않다. 한국화는 블루오션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그는 서양화만 배운 사람들이 한국화 기법을 수용해 활용하기 어려운 반면, 한국화 전공자들이 서양화 기법을 활용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운 만큼 한국화 전공자에게는 오히려 더 큰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초상화기법에서 나온 장지기법’이야말로 한국화 고유의 기법이다. 10년전부터 ‘겹의 미학’이란 주제로 전시도 해오고 있다”는 김선두는 “여러번 맑게 칠하지만 투명한 맛을 주는 장지 기법을 우리네 김치와 장맛에 비유할 수 있다. 마치 남극 빙하가 10%만 수면 위에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 90%의 본체가 있는 것과도 비슷하겠다”고 말한다.
1958년생인 김선두는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에서 태어나 중학교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제7회 중앙미술대전 대상과 제12회 석남미술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화단의 관심을 받았다. 2019년 제68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서울, 뉴욕, 파리 등 주요 도시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으며, 많은 미술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또한, 여러 국제 미술 대회에서 수상하며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올해 2월에 중앙대학교 한국화과 교수에서 정년 퇴임한 그는, 가락동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전시는 8월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