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지극히 세련된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어 달항아리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그은 선 (Karma)은 제가 살아온 인생길을 그린 겁니다.”
20여년간 달항아리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그려온 최영욱(60)이 한층 더 비워낸 신작 ‘카르마(Karma)’ 시리즈 28점을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발표했다.
조선백자는 순백의 깨끗함, 단아함, 절제미를 지닌다. 최영욱의 신작도 더욱더 비워지고 있다. 이제 그 형태마저 사라져간다.
“그동안 달항아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명암과 묘사를 더 했는데 요즘은 군더더기를 빼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작가를 갤러리에서 두차례 만났다.
달항아리로 불리는 조선 백자대호(白磁大壺)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모든 것을 비워낸 듯하면서도 따뜻한 어머니처럼 기품을 지닌 대상이다. 영국 도예 거장 버나드 리치는 조선 백자대호를 구입하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고 했다. 미술품 경매에서도 인기리에 낙찰된다.
달항아리는 보통 흰색이다. 그런데 최영욱의 그림 속 달항아리는 흰빛 속에서도 미세한 컬러감이 더 있다. 섬세하게 푸른빛, 잿빛, 미색 등 다채로운 컬러가 녹아있다. 또 몇 년 전부터 준비해온 검은 달항아리 그림과 형태를 없애 추상성이 강조된 작품도 나왔다.
그의 달항아리 회화는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어왔다. 2011년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그의 작품들을 소장했다. 이후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왕실의 컬렉션 목록에도 들어갔다. 2020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헬렌J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출품작도 모두 완판됐다. 올해 10월 10~13일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열리는 포커스아트페어에도 개인전 형태로 참가해 인기를 끌고 있다.
#달항아리 회화가 사랑받는 이유
그의 ‘카르마’ 작품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제작 과정을 살펴보았다.
작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평일, 휴일 가리지 않고 작업한다. 그리고 매일 작업 전에 자연을 산책하며 자연과 호흡하며 몸과 마음을 맑게 정화한 후 작업을 시작한다.
작업을 위해 캔버스에 젯소와 흰색 돌가루를 쌓고 사포질로 수십번 갈아내고 또 쌓기를 반복한다. 보통 80번, 많게는 100번도 반복한다. 이 과정에 수성·무광택의 동양화 채색안료·아크릴 붓질도 셀 수 없이 쌓인다.
작가는 “물감을 얇게 수십번 칠하는 과정이 흙을 매만지는 과정과 같은데, 그러면서 생성된 은은한 색감 때문에 많은 분이 좋아하시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의 작품 속 달항아리의 또다른 매력인 ‘빙렬(氷裂)’을 들 수 있다. 최영욱 작품의 핵심인 빙렬은 도자기 표면에 바른 유약이 식으며 생긴 가는 실금이다. 셀수 없이 많은 작은 선들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빙열은 감성을 어루만지는 서정적 화면과 어우러져 작품을 서사적으로까지 승화시킨다.
작가는 "빙렬 작업을 할 때 자연스럽게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생각하며 선을 긋기 시작했다"면서 “제가 그린 ‘카르마’는 선에 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선은 도자기의 빙렬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의 인생길이죠. 갈라지면서 이어지듯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비슷한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지요.”
감성을 어루만지면서 서정성은 물론, 서사성까지 연결되는 빙렬은 작품의 주제 카르마(업보, 인연)와 연결된다. 또 작가는 수행자적 태도를 통해 일기를 쓰듯 매일 수도하듯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달항아리를 빚어낸단다. 아주 가는 세필로 고도의 정신적 집중과 고된 육체적 작업을 통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을 그리면서 우리네 삶 속의 인연과 카르마 등을 표현해내는 셈이다.
“작업을 하면서 매일 수행하듯 하는 구도자적 자세가 정말 가능한가” 질문도 던졌다.
작가는 “일필휘지의 작업을 하고 싶기도 하고 실제 다양한 작업들을 중간중간한다”면서 “하지만 현재 이 작업의 과정들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산책을 하거나 명상을 하고 캔버스 앞에 앉아 작업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고 이런 삶에 감사하다. 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무작정 떠난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만난 달항아리와의 인연
그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달항아리에 꽂혀 그리게 됐을까.
학교(홍익대학교와 대학원)를 졸업하고 입시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도 작가로서의 길을 고민하던 2000년대 초반 무작정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작가. 그에게 또한번의 카르마였던 셈이다.
“당시에는 들판의 풍경화를 그렸고, 미국 가기 직전에는 항아리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어요. 마침 미국 여러 미술관에서 한국 백자를 보게 되었는데 결정적으로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한국관에 전시된 달항아리를 만나게 된 겁니다.”
그가 ‘작가로서의 길’이 이렇게 준비되어 있었던 셈이다. 달항아리를 누워서 보기도 하고, 앉아서도 보면서 달항아리의 형태가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큰 감동이 밀려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전시장에 머물러 있던 그는, 그때부터 달항아리를 그리던 방법과 그림을 그리는 태도와 이유를 치열하게 바꾸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빌 게이츠 재단이 소장하게 되었고, 재단 건물완공식에도 초대받아 빌 게이츠도 만났다. 이것이 최영욱 최고의 ‘카르마’였다.
이번에 새로 선보인 ‘선만 그은 신작’에 대해서 작가는 “‘소박하지만 지극히 세련된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항아리 이미지를 그리고, 그 안에 그은 선(karma)들은 제가 살아온 인생길을 그린 겁니다. 신작으로 내놓은 항아리 이미지를 지운 작품은 인연, 업을 더 강조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평론가 임창섭은 “최영욱의 ‘카르마’ 작품은 달항아리가 가진 색과 형태를 그래도 모방한 것이 아니다. 달항아리는 단지 소재일 뿐, 그는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구분해 내는 특출한 감각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평한다. 기대할 것 없는 세상, 저절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느슨한 지식이 아니라, 끝없는 믿음과 노력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든다는 진실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오광수 평론가는 예전 전시평에서 “그가 그리는 백자는 한 편의 시요, 꿈결에서 만나는 해맑은 서사이자 아름다움의 실체이고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 썼다. 전시는 21일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