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지하 1층에 들어서면 선술집처럼 꾸며진 공간을 만나게 된다. 낙지볶음, 조개탕, 돼지갈비, 동태찌개, 백반 등 메뉴판이 있고, 탁자와 의자 세트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주방이나 셰프, 주문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강소 작가가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었던 첫 개인전 퍼포먼스 작품 ‘소멸-화랑 내 선술집’(1973)을 재현해 놓은 현장이다.
한국현대작가 중 대표작가로 꼽히는 이강소(81) 화백의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드문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국현이 마련한 《이강소: 風來水面時 풍래수면시》전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개념적 실험작업을 시도한 한국 대표 현대미술작가 이강소 화백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한다.
전시장에는 80대 작가의 청년시절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누드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작업한 것을 비롯해,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작가의 개념적이면서 실험적인 작품들이 흥미롭다.
전시명 ‘풍래수면시’는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송나라 성리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시 ‘청야음(淸夜吟)’에서 따왔다.
이강소 화백은 ‘오리 작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회화와 조각, 설치, 판화,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다채로운 작업을 해왔다.
실제로 이 화백은 이미지의 인식과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 온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다. 청년시절부터 현대실험적인 작품을 다채롭게 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집, 배, 오리, 사슴 등의 구상 회화를 선보이면서 그를 회화작가로만 알고 있는 애호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이강소 바로 알기’라는 측면에서 반가운 전시다. 이번 전시는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지 방식을 질문하고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 온 작가의 예술세계를 함축한다.
이번 전시는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지 방식을 질문하고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 온 작가의 예술세계를 함축한다. 작가에게 “오리는 왜 그렇게 많이 그렸는지” 물어보면 “사실 나는 오리를 그리려고 그린 것이 아니에요”라고 대답한다. 산책을 좋아했던 그는 공원이나 동물원에서 움직이는 동물 보기를 즐겨했는데, 1980년대 후반 뉴욕주립대 초빙 교수로 가서 호수에 떠다니는 오리를 보면서 그들의 생명력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오리라는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오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오리’라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명은 그들의 움직임의 파동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표현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오리나 사슴, 배 등의 대상은 형태를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움직임 또는 그들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거다. 따라서 오리 형태로 보이는 대상도 오리를 그린 것이 아니라는 거다.
작가는 “보는 사람들이 각자 머릿속에서 다 다르게 연상할 수 있고 떠올릴 수 있도록 자유로움을 제공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집안의 영향으로 동양철학과 한국철학, 중국화론 등에 관심이 컸던 작가는 “사람마다 마음으로 대상을 본다. 그러니 모두 다 객관적인 대상은 없다. 어떤 이에게 사슴처럼 보이는 그림이 다른 이에게는 뾰족 뾰족한 덩어리로 보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이 화백은 오리 도상을 반복적으로 그리면서도 작품의 의미와 해석을 관객에게 열어두었다. ‘오리’라는 특정한 상징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의 경험과 시선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는 존재이다. 오리는 자유를 상징할 수도 있고, 또 관객 자신이 대입한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유동적인 존재이다.
“작품은 관람객에 의해 완성된다”는 이 화백은 작품에서 자아를 지우고 열림 해석의 구조를 지향한다. 이런 열린 해석의 구조에 대한 생각은 첫 전시 때부터 시작됐다. 1973년 명동화랑 첫 개인전 퍼포먼스 작품인 ‘선술집’(1973)은 사진으로 설치되어 있다.
반백년 전 명동에서 이벤트로 화랑 내에 선술집을 여는 획기적인 퍼포먼스를 열어 시대를 앞서갔던 작가는, 그때 선배와 마주 앉아서 ‘전에 왔던 사람들이 지금 없듯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중에는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0년대 신체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서울비엔날레, 에꼴드서울 등 당시 현대미술운동에 참가하며 실험미술작업을 시작했다. 1974-1979년까지 대구현대미술제를 기획, 동료 작가들과 함께 서구의 미술사와 다른 한국현대미술 고유의 철학적, 미술적 태도를 찾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비디오, 판화, 영상 등으로 기존의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전복할 수 있는 매체 실험을 함께 진행했다.
그런 한편 제9회 파리비엔날레(1975), 제2회 시드니비엔날레(1976), 제10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1976), 제14회 상파울루비엔날레(1977)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80년대 이후에는 사유의 과정에 천착하며 회화작업에 몰두했다.
작가는 1980년대 초 추상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 집, 배, 오리, 사슴의 등의 구상을 거쳐, 1990년대 이후 추상과 구상을 오가며 상상적 실재를 이야기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글자와 추상의 경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작업 시리즈로 계속됐다.
전시는 197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가가 꾸준히 탐구해 온 두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질문은 창작자이자 세상을 만나는 주체로서 작가 자신의 인식에 대한 회의이다. 전시는 비디오, 이벤트와 같은 새로운 매체뿐만 아니라 회화, 판화, 조각 등의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며 창작자로서 작가의 의도적 행위를 내려놓고, 새로운 감각과 경험의 가능성을 작품에 담고자 노력하였던 작가의 궤적을 따라간다.
두 번째 질문은 작가와 관람객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의문이다. 명동화랑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의 ‘소멸-화랑 내 선술집’(1973)에서부터 시작한 객관적인 현실과 그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의심은 텍스트와 오브제, 이미지를 오가며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질문을 던진다. 관찰자인 감상자가 작품을 완성한다면서 다양한 인지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열린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3 전시실에서는 실험미술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이후 창작자로서 작가의 역할과 한계를 질문하던 시기,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새로운 매체를 처음 접한 후에도 지속된 작품들을 소개한다. 비디오 작업 ‘페인팅 78-1’(1978)과 누드 퍼포먼스 ‘페인팅 (이벤트 77-2)’(1977)는 각각 그리는 행위를 통해 오히려 작가 본인이 지워지거나, 작가의 몸에 묻은 물감을 지워내는 과정에서 회화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비디오–2 작업 ‘페인팅 78-1’(1978)과 연계해 작가가 1977년 리화랑 옥상에서 유리에 칠을 하며 실험했던 사진 작업이 처음 발굴되어 함께 출품됐다. ‘작가 지우기’의 노력을 보여준다. 최근 선보인 테라코타 등의 재료를 던져 만드는 ‘만들어지는 조각’도 작가 지우기의 연장선에 있다.
1980년대 초 추상적 드로잉을 시작, 미국 시기를 거치고 작가는 창작자의 의도대로 감상자가 작품을 해석하는데 회의를 느끼며 회화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고민했다. 이런 고민은 감상자의 마음과 생각, 기억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작가적 태도로 발전해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집, 배, 오리, 사슴 등의 구상 시리즈까지 선보인다. 관객이 자신의 경험과 인지 방식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며 완성되는 열린 구조의 작업을 지향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제4 전시실에서는 초기 작업부터 2000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바라보는 대상을 의심하며,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고민했던 이강소의 작업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이강소 작가는 ‘존재는 불안정하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작가 자신의 철학을 회화적 실험으로 잘 드러냈다”면서 “회고전과는 구별되는 이번 전시는 작가가 평생 추구한 개념들을 시대와 매체, 표현에 따라 느껴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전시는 내년 4월 13일까지.
<사진 = MMCA 서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