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짠돌이’ 캐릭터가 예능에서 급부상하고 있다. 김생민은 방송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한 실제 자신의 캐릭터로 25년 만에 처음으로 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다. 이상민은 화려한 성공에서 추락해 70억원의 빚을 떠안고 푼돈에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생활로 ‘궁상민’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사랑받고 있다. 이들 캐릭터는 불황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관통한다. 이것이 ‘궁상 신드롬’의 배경이다.
소시민의 실질적인 경제 지침
김생민의 최근 인기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오랜 시간 리포터로 TV에 등장해온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아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목받아온 적 없는 소소한 ‘직업 방송인’의 영역에 자리해 왔기 때문이다.
인기의 시작은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 코너에서 독립한 ‘김생민의 영수증’이었다. 지상파 프로그램도 아닌 팟캐스트인 ‘김생민의 영수증’이 놀라운 인기를 끌면서 지상파 예능에 섭외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김생민의 영수증’이 KBS 정규방송으로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프로그램은 청취자의 소비 내역이 담긴 영수증을 분석하는 단순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김생민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청취자의 소비 실태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예쁘게 찍기 위해 패티큐어 비용을 썼다’는 청취자에게 ‘발은 모래로 덮고 사진을 찍으면 된다’고 조언하는 식이다. 프로그램에서 소비 형태에 대한 평가로 사용되는 ‘스튜핏’ ‘그뤠잇’이라는 단어는 이미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절약이 미덕일 수밖에 없는 불황의 시대에 김생민은 대중의 공감을 얻고 있다. 실제로 ‘자신의 소비를 반성할 수 있어서 좋다’는 시청자가 많으며, ‘작은 소비에도 고민을 거듭하는 소시민의 실질적인 경제 지침’이라서 신선하다고들 평한다.
김생민 캐릭터의 미덕은 진정성에 있기도 하다. 그는 이미 연예계에서 돈 안 쓰기로 유명하다. 외모만 봐도 화려한 방송가에서 평범한 회사원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을 고수해왔다.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절약 메시지도 알고 보면 예능에 등장해서 꾸준히 전파해왔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서야 그 캐릭터는 빛을 발하게 됐을까?
대부분의 소비는 무의미한 것이다
유머감각이 좋기도 하지만, 김생민이 더욱 ‘유쾌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시대적 감수성과 맞닿아 있다. 사실 김생민의 경제 지침은 가혹한 수준이다. 김생민의 기준에서 대부분의 소비는 ‘어리석은 짓’이다. 음악을 듣기 위한 비용도, 커피 한 잔도 다 거부해야 할 ‘사치’다. 경제성장을 누린 50~60대들에게 이런 것들이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것에 역행한다.
이는 과거에 미덕으로 권장돼온 절약과도 전혀 다른 성격이다. 과거 절약은 물자의 부족에 대한 정부의 대처이자 부의 수단으로 홍보됐다. 근본적으로 대중이 바라보는 곳은 ‘부’였으며, ‘절약’은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물자의 부족이 해소되면서 오히려 ‘소비’가 미덕으로 떠올랐다. 2000년대 히트한 신용카드 광고 CM송에는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가사가 들어있었다. 그때의 ‘즐김’은 ‘소비’임이 명백했다. 비슷한 시기에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국민적 인기를 누렸던 것도 사회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지금은 어떤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허황된 인사말이거나 오히려 조롱같이 들린다. 청년들에게 ‘그냥 카드 긁고 흥청망청 인생 즐겨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누가 기분 좋게 웃을 수 있겠는가. ‘금수저’라는 단어부터 떠오르지 않겠는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확산으로 불평등이 심화된 이 시점에서 아무도 ‘부자 되세요’라는 기업의 인사를 믿지 않는다. 청년들은 ‘니들만 부자가 되겠지’라는 말이 자동반사적으로 나온다. ‘인생을 즐겨라’고 말하면 ‘누구 좋으라고’라는 생각부터 든다. 과거에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연예인들의 호화로운 일상이나 볼거리였던 고급 주택 내부도 지금은 TV에 등장하면 비난의 대상이다. 그래서 요즘 연예인들은 ‘서민 코스프레’를 할 지경이다.
불황은 허세를 버리고 ‘가성비’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합리적 소비문화를 조성했다. 김생민은 이를 넘어서 최소한의 소비를 주장한다. 이는 마치 부조리한 자본주의와의 싸움처럼 보인다. 욕망을 만들고, 그 욕망의 노예가 되는 자본주의의 속성 자체를 간파하고 속지 않기 위한 처세에 가깝다. 과도한 절약을 내세운 캐릭터가 국민적 사랑을 받는 것은 김생민이 처음이다. ‘김생민 신드롬’은 의식하든 아니든 가짜욕망을 이겨 내고자하는 대중들이 많아진 결과다.
‘선망’의 대상에서 ‘공감’의 대상으로
최근 예능에 이어 광고계까지 장악하고 있는 이상민의 인기도 비슷한 배경을 읽을 수 있다. ‘채무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이상민은 마치 국가의 경제 상황처럼 부흥의 화려한 시절을 거쳐 몰락에 이르렀다. 채권자가 제공한 집에서 살며 생필품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궁상’의 삶이지만, 과거의 취향은 남아서 안목이나 지식은 고급스럽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가성비’를 간파할 능력이 있다. 돈이 없지만 삶은 즐길 수 있다. 실제로 이상민은 “현재가 과거보다 행복하다”는 인터뷰를 여러 번 했는데, 여러 정황을 볼 때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가난하지만 그래서 더욱 본질에 가까운 삶. 대중이 이상민과 동질감을 느끼는 지점이다.
이외에도 ‘나 혼자 산다’의 육중완 이시언 기안84, 이상민 이전에 ‘파산’ 이미지를 예능화한 윤정수 등 예능에서 ‘궁상’ 캐릭터들은 대부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는 연예인이 ‘선망’의 대상에서 ‘공감’의 대상으로 전환한 문화소비 방식의 변화와도 관련이 깊다. 문화평론가 서지혜씨는 “TV 속의 화려한 삶은 꿈조차 꿀 수 없는 괴리가 생겼다. 경제 계층에 대한 적대감도 높아지면서 연예인들의 ‘럭셔리’는 반감을 사기 좋은 이미지가 됐다. 반면, 내 모습이나 무의식을 대변하는 연예인에게는 호감을 느끼는 대중들이 많아졌다. 소박하고 특별히 잘나지 않은 연예인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공감을 즐기는 시대”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