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최근 문화예술계에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번지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계에서는 권력이나 지위를 이용한 유명인의 성폭력 행태를 둘러싼 고발이 봇물 터진듯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를 포함한 한국 사회 전반의 시스템과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사회적 관심이 사라진 이후 같은 사태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 <시사뉴스>는 여성문화예술연합 전유진 정책실장을 만나 미투 운동과 여성 인권 등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 변화의 필요성 등을 짚어봤다.
현재 이어지는 성폭력 폭로를 어떻게 평가 전망하시나요.
예술계 내 성폭력은 오랜 기간 관습적으로 자행되어 왔고, 선생, 교수,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 등 권력자에 의한 폭력이기 때문에 피해자 입장에서는 폭로가 있기 까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술계 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의 실명이 거론되고, 그들의 폭력을 뒷받침하는 증언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사회적으로도 간과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계의 성범죄 실태를 어느 수준으로 생각하시나요.
오랜 기간 반복적인 형태로 자행되어 왔다는 것과 가해자 한 명에 다수의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예술계 내에서 이러한 성범죄가 얼마나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그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가해가 지속될 수 있도록 방조하고 침묵한 주변이 있었기 때문에 예술계 내 성폭력은 공동체 내 성폭력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타 분야보다 더 심각하다고 판단하시나요.
예술계라고 하는 좁은 영역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사건이 계속 은폐되고, 같은 형태의 폭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예술계는 회사와 같은 조직과는 그 성격이 다른 공동체이기 때문에 폭력의 형태가 연쇄적이며 복잡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술의 경우 어릴 때부터 배우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빠르게는 십대부터 이런 폭력에 노출되고, 대학교, 대학원, 사회에 나가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양상이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예술계 내에서 가해자의 성적 기행과 폭력이 마치 ‘예술적’인 것으로, 혹은 ‘예술을 위한 것’으로 용인되어 온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요. 사실 예술은 명백한 범죄 행위를 은폐시키기 위한 빌미로 이용된 것이지 이 발단에는 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여성혐오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그것이 폭력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때, 예술이든 뭐든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술은 핑계이고, 그것이 뻔히 폭력인 것을 알지만 대부분의 가해자들이 소위 네임밸류와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것은 사회적인 책임도 있습니다. 문제가 된 사건의 가해자들 대부분이 공적 지위에 있거나, 오랜 시간 공공 기금, 지원 등으로 활동하며 권력을 키워왔고요. 피해자 보호, 가해자 제재 등 예술계의 특수성이 반영된 제도적 장치가 사회적으로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예술계에서 여권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나요.
예술계 내의 여권 수준을 모든 면에서 설명하기는 힘들겠지만, 성폭력과 관련해서 이야기했을 때 매우 낙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예술가들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인맥에 의존해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강경한 대처가 더욱 어렵습니다. 워낙 좁은 영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법적 조치로 이어지기 어렵고 예술계 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문제해결을 강구해줄 성폭력 전담 기구 혹은 신고 센터 또한 없기 때문에 피해자는 침묵하거나 예술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특히 예술을 배우는 학생, 예비예술가, 신진예술가 등 예술계 내에서 약자인 여성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각오 없이 이런 폭력에 맞서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연유로 SNS를 통한 폭로가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 수밖에 없고요.
작년에 정부에 정책 제안을 하셨다는데, 어떤 정책들을 제안하셨나요.
여성문화예술연합은 2017년 문체부에 '문화예술계 성폭력 관련 특별 실태조사 실시'를 포함한 11개의 정책 제안을 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문체부 내 문화예술계 성폭력 신고·상담 전담기구 설치, 실태조사 실시, 성폭력 예방 교육 강화 등을 중점으로 제도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했죠. 제도나 정책을 만들려면 근거가 있어야 해요. 그런 측면에서 실태조사가 중요합니다.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는 실태조사를 정례화해야 해야 하고요.
이밖에 문화예술계 전반을 아우르는 전담기구 설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술계는 큰 덩어리의 공동체로 봐야 합니다. 학교나 학원이라는 공간, 특정 프로젝트 현장이나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들이 거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죠. 다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구요. 우리 측은 전담기구 신설이 당장 어려우면 예술인복지재단이 업무를 담당하는 안도 제안했지만, 이 역시 예산을 이유로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정책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지금까지 저희가 제안했던 정책들 중에 실태조사를 제외하고는 진행된 것이 없었습니다. 실태조사도 예산이 부족해 아주 작은 범위를 대상으로 시행된 시범조사였습니다. 조사 문항조차도 예술계 내 특수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수준이어서 저희 연합에서 문항을 수정해야 했었고요. 성폭력에 대처하는 전담 기구, 신고 창구 개설 또한 작년 한 해 동안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예산부족 등의 이유로 진척이 없었습니다. 최근 미투 운동에 대응해 실태조사와 신고 창구 개설을 진행하겠다는 문체부의 언론 발표가 있었는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될 지 지켜봐야하는 상황입니다.
예술계 자체적으로는 어떤 대책을 마련 중이신가요.
현재 가장 문제가 된 연극계에서 성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모임이 조직된 것으로 알고 있고, 저희 연합에서도 이들과 연대하려고 합니다. 이번 미투 운동이 단순 폭로로만 그치거나, 작년 해시태그 운동처럼 가해자에 의한 보복성 고소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확실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예술계 각 영역이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문화예술계 내에서 일어난 문제인 만큼 그것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주체를 문체부라고 보고, 진상 조사와 정책 마련 등을 강력하게 요청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예술계 내 성폭력은 고질적인 문제인 만큼 여전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일련의 폭로에 어떤 식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은 폭로가 이어지고, 변화를 꾀할 수 있는 토대 또한 형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힘겹게 꺼낸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단순 가십이나 자극적인 소재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고, 모두가 이 사안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해결하기 위해 어떤 대처가 필요한지 논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