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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기억의 살인자> 치매 노인의 집요한 복수극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가족을 죽인 아우슈비츠의 나치를 찾아 원수를 갚기 위해 기억을 재구성하는 유대인 노인을 따라가는 스릴러다. <나이브스 아웃>의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출연했다. 7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31회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등 세계 10여 개의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됐으며, 38회 밀밸리 영화제 월드시네마 은상과 30회 마르델플라타국제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다.

다양한 가해자들의 태도

은퇴 후 요양병원에서 조용한 삶을 사는 거트만은 현실에 대한 인지력이 오락가락하는 치매 노인이다. 같은 요양병원의 친구 맥스는 그에게 편지를 전달해 거트만이 잊고 사는 기억을 일깨워준다. 편지는 자신이 치매이며 일주일 전 아내가 죽었고, 자신의 일가족을 죽인 아우슈비츠 나치 전범을 찾아 복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거트만이 가진 치매라는 핸디캡은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의 복수극인 <아이덴티티>를 연상시킨다. 치매는 영화적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메시지인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효과적 장치다.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에서 기억은 역사를 의미한다. 영화는 나치의 역사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가치관에 대한 노골적 상징들로 이어진다.

기억의 소멸이란 그 감정 또한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기억을 잃은 거트만을 일깨우는 것은 편지라는 기록이 전부다. 편지를 읽을 때마다 거트만은 희미해진 복수라는 사명을 붙잡는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기억을 삭제한 것은 아니다. 바그너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거트만의 모습에서 암시했듯, 그는 옅은 기억 저편에서 그 복수가 어떤 의미인지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일가족을 몰살시킨 원수를 찾는 과정에서 관객은 다양하면서도 전형적인 가해자들의 태도와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위조하고 숨겨서 없는 역사로 은폐하거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만 과거를 조작해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신분 세탁하는 것은 생존의 기술이자 자기 자신과 후손을 속여 자기 미화로 삶을 버티기 위한 추악한 방법이다. 

여전히 자신의 방 구석에 과거에 대한 반성은커녕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던 전범자도 있다. 그 가치관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나치주의자 아들을 보여주며 지나간 역사가 단지 과거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그것은 단지 과거인가를 영화는 묻는다. 영화는 잘못된 역사에 대한 인식과 반성,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은폐될 때 어떤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지 경고한다. ‘단지 사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대사 속에서 피해자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그에 비해 가해자에 대한 처리와 과거에 대한 반성은 얼마나 부족한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담백한 드라마, 묵직한 사회물

우리에게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고, 진실을 크게 외치는 것은 가해자로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진실을 회피한다면 그 삶은 무가치한 거짓에 불과하다고 영화는 말한다. 가해자들이 기억상실에 빠졌을만큼 오래된 과거라고 해도, 그들이 이미 죽었다고 해도, 역사는 분명히 존재하며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한국인에게는 결코 진부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다.

영화는 스릴러적 구성을 취하지만, 장르적 즐거움보다는 담백하게 노인의 행적을 따라가며 드라마에 집중한다. 느리고 답답하게, 조마조마 하고도 집요하게 이어지는 노인의 행동들은 그래서 더욱 감동을 준다.

그 고단한 ‘역사의 단죄’가 죽음을 앞둔, 심지어 기억마저 희미한 노인에게 조차 왜 중요한 것인지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삶의 끝에 서 있다는 점은 자주 삶의 무상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돼왔지만, 이 영화는 죽음을 목전에 둔 존재를 통해 오히려 생존 이상으로 중요한 삶의 본질을 말한다.

사적 복수가 곧 역사적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복수를 의미하는 노인 영화이자 스릴러라는 점에서 올해 제작된 <굿 라이어> 또한 연상시킨다. <굿 라이어>가 보다 미국적 장르물에 가깝다면, 독일 영화인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는 역사에 대한 묵직하고 직설적 시선을 보여준다. 힘없고 지친 모습과 처절한 의지를 동시에 묘사해낸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인상적 연기는 영화의 설득력을 높이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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