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의 의미가 중요해졌다. 1인 가구도 늘고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가정도 늘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도 우리나라 전체의 약 30%에 이른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듯, 국립현대미술관이 ‘반려’의 의미를 묻는 최초의 ‘개를 위한 전시’를 기획해 주목받고 있다.
전시명은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29일부터 10월 25일까지 전시된다. 이미 25일 유투브로 선공개하면서 반려견을 키우는 반려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간 개들의 출입을 금지해온 미술관, 그중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이 반려견을 관람객으로 초대했다. 문호를 ‘동물’에게까지 개방한 것은 흥미롭고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담당 학예사도 기획안을 제출할 당시, 전시 심의를 통과해서 진짜 전시로 실행될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용희 학예사는 “반려동물을 가족이라고 얘기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개를 실제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장소는 한정적”이라며 “가족이 될 수 없는 반려동물을 생각하면서 미술관이 얼마나 열린 공간이 될 수 있을지 실험해보았다”고 밝혔다.
이는 인간이 아닌 비인간에 대해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이자, 과연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반려문화를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소 도전적인 시험이기도 한 전시이다. 이는 반려인들에게는 반려견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는 전시임이 분명하다.
이번 전시에는 퍼포먼스와 스크리닝(영화)이 함께 한다. 또 난생처음 펼쳐지는 반려견을 위한 전시의 성공을 위해 미술작가 이외에 수의사, 조경가, 건축가, 법학자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설채현, 조광민 수의사는 돌물 행동 및 감정, 습성에 대한 자문을, 김수진 인천대 법학부 교수는 법률자문을, 김경재 건축가는 개를 위한 건축과 조경을 맡았다. 김은희 독립큐레이터는 스크리닝(영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주제는 ‘인류세-광장’ ‘고통스러운 반려’ ‘소중한 타자성’ ‘더불어 되기’ ‘자연문화’ ‘자기중심적 세계(Umwelt)’ 등이다. 보통 사람들은 인간이 개를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하지만 해러웨이(Donna Haraway)를 비롯한 여러 분야 학자들은 인간과 개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말한다.
전시에는 참여작가 13명(팀)이 신작 7점을 포함해 설치, 조각, 애니메이션 등 작품 20점을 내놓았다.
조각스카웃은 도그 어질리티 경기(개와 인간의 협동 스포츠)에서 사용되는 오브제들과 개들이 식별할 수 있는 색(노랑, 파랑 기준)과 추상 조각에서 돋보이는 요소들에서 작품의 형태를 빌어온 작품들을 만들었다. 권군 작가는 “놀이터이기도 한 추상적 조각들을 만들면서 개들이 미술관 앞마당에서 낯선 경험도 하고, 또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사진작가 권도연은 오랜 시간 북한산에서 관찰한 들개를 사진에 담았다. 인간에게 길들여졌던 반려견이 세대를 지나 들개가 되어 북한산 위에서 야성을 내뿜는 모습은 인간과의 관계맺음 혹은 길들여짐을 자의건 타의건 거부한 채 독립적 개체로서의 당당함을 느끼게 한다.
김용관 작가는 개를 위한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알아둬, 나는 크고 위험하지 않아!’란 작품명을 붙였다.
김 작가는 “2,3세 아이들처럼 개들도 처음보는 물건을 관찰하다가 본래의 용도가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갖고 노는 것으로 안다. 작품이 크고 낯설어서 무서워할 수도 있지만 다가와서 냄새맡고 만져보고 굴리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으면 한다”고 의미를 붙였다. 작품 ‘푸르고 노란’과 ‘다가서면 보이는’는 적록색맹으로 빨간색과 녹색을 보지 못하고 파란색과 노란색만 보는 개를 대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숲의 다채로운 녹색을 느끼지 못하는 개를 위해 작가는 녹색이 아닌, 파란색과 노란색을 이용해 자연을 느낄만한 작품을 내어놓고, 파랑과 노랑 그라데이션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건축가 김경재는 아예 개들이 편하게 이용할만한 거실 가구를 만들었다. 그에게 공간은 관계를 보여주는 도식(diagram)인 만큼, 이 전시에서는 인간과 개의 관계를 ‘건축’을 통해 보여주는 도식이 된다. 가구들의 다리를 싹뚝 잘라서 개가 폴짝 뛰어다니고 앉을 수 있는 아주 낮은 거실 작품 ‘가까운 미래, 남의 거실 이용방법’(2020)을 만들었다. 사람이 앉기에는 무릎도 아프고 불편하기 그지 없다. 또 개들을 위한 회의실도 한켠에 마련되어 있다.
작가 정연두는 동물 사료를 배합한 재료로 영웅견 군상을 만들었다. 1925년 알래스카 극한의 추위에 전염병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개썰매를 끌어 면역 혈청을 옮긴 영웅견 스토리를 토대로 ‘토고와 발토-인류를 구한 영웅견 군상’(2020)을 세웠다. 개들이 좋아하는 연어, 치즈 등 사료로 만들어 미술관에 방문한 개들은 이 작품 가까이 코를 킁킁대며 다가와 영웅견 군상을 우러러보게 된다. 전염병의 위기가 동물로부터 왔다는 점과 동물이 인류를 구한다는 역설적 병치가 이 작품의 아이러니다.
반려견이 사람을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그들의 끝없는 기다림과 충성, 사랑스러움이 아닐까. 런던 첼시앤웨스트민스터 병원 공모전에 당선된 프로젝트 ‘기다릴 수 없어’(2017)는 엘리 허경란이 동물 병원 대기실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다양한 캐릭터의 개들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말하자면’(2012)은 런던 햄스테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농산물 직거래 장터 방문객들의 반려견들이 주인을 한없이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통해 반려의 의미, 그 경계를 넘나드는 개들의 순수함 등 미묘하고 복잡한 여러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끝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반려견을 보면서 ‘반려’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반려견들의 순수함과 미묘하고 복잡한 여러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조경가 유승종은 ‘모두를 위한 숲’(2020)을 전시장에 조성했다. 그림 같은 관조의 숲이나 공원 같은 공간 대신, 작가가 철저히 만들어낸 인공 숲을 반려인과 반려견이 즐겁게 다니게 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나무 조각, 낙엽 등 인위적으로 옮겨온 구성물들과 진짜 식물이 함께 하는 혼성의 공간이다. 작가는 한정된 공간 안에 이질적인 자연을 만들고, 냄새와 소리, 공기, 분위기, 천정에서 떨어지는 빗물 등 종합적인 하나의 시스템을 이식했다. ‘자연은 무엇인가’ ‘숲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다.
소련 우주선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간 개를 3D 모션그래픽으로 만든 김세진의 ‘전령(들)’은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오만과 우주를 향한 식민주의적 욕망을 비판하고, 데멜자 코이는 유전자 변형을 통해 애완동물을 디자인하는 과학자 이야기를 담은 비디오 ‘브리오’로 인간중심주의와 애완 소비문화를 비튼다.
한느 닐센과 비르기트 욘센(덴마크)은 카메라를 장착한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의 산책을 기록한 2채널 영상작업 ‘보이지 않는 산책’(2016)을 선보였다. 또 영화 ‘정글북’을 재해석한 데이비드 클레어보트의 애니메이션, 베아테 귀트쇼의 사진 등도 출품됐다.
전시 외에 김정선과 김재리, 남화연, 다이애나밴드, 양아치, 박보나 작가가 퍼포먼스를 펼치고, 장뤼크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 데릭 저먼의 ‘블루’, 안리 살라의 ‘필요충분조건’ 등 3편의 영화도 상영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제껏 미술관에 온 적 없는 ‘반려동물 개’를 새로운 관람객으로 맞이함으로써 미술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길 바랬다”고 밝혔다.
관람을 위해서는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02-3701-9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