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찬 바람 속에 한 사내가 서있다. 하늘과 바다도 요동친다. 지팡이를 쥔 등굽은 사내의 고독한 등 뒤에는 그를 닮은 소나무가 휘청거린다. 세상은 온통 황토빛이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1926-2013)의 개인전 <시대의 빛과 바람>展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6일부터 개막, 11월 15일까지 열린 가운데, 관객들의 감동 리뷰가 이어지고 있다. 가나아트와 공익재단법인 아트시지(이사장 변정훈)가 공동 기획한 이 전시에는 변시지 화백의 제주 시절(1975-2013) 대표작 50여점이 걸렸다.
변시지는 국내 보다 해외에서 먼저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세계 최대 박물관인 미국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이 2007년부터 10년간 작품 두점을 상설전시했고, 야후(YAHOO) 본사가 1997년 ‘세계 100대 화가’로 선정한 작가이다. 스미소니언은 174년의 역사를 가진 19개 박물관, 미술관, 연구소, 도서관 등 문화기관의 집합체로 연간 3000만명 이상의 방문자들이 무료 관람하는 초대형 박물관. 영화 '박물관은 살아있다' 속에 나오는 박물관이기도 하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그를 '제주 지역작가'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살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스미소니언의 캐롤 니브스(Carole Neves) 박사는 상설전시 당시, “우리는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한국 예술가를 찾지 않는다...제주성을 그린 변시지의 표현을 보면 그는 지역적인 특성에서 영감을 받았다”면서 “그는 국제적으로 눈에 띄고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워싱턴에서 이런 종류의 예술과 경이로운 작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미술평론가 김영호 교수(중앙대) 역시 "변시지 화백의 작품은 제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제주의 울타리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그는 제주 작가가 아니다"면서 "변시지 화백이 역사속으로 날개를 접었지만, 그의 예술은 신화가 되어 재활할 가능태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작가 생전에 관련 글을 썼던 김영호 교수는 "작품 속 초가집이며 돌담, 정주석, 소나무, 조랑말, 그리고 까마귀 같은 제주의 풍물들은 변시지 화백이 경영하는 화면에 초대되어 새 생명을 구가하고 있다"면서 "사색의 마당에 거칠게 자리잡은 황갈색 빛과 검정색 선묘는 은유와 환유의 언어가 되었고, 폭풍속에 초가집을 지키는 외로운 사내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드러내는 시각기호가 되었다"고 평했다.
작품을 감상하면 작가의 고독, 은둔, 대화, 기다림, 방랑, 무소유 등이 느껴진다. 무소유의 철학은 밭이나 언덕 그리고 초가집 내부 등 비어있는 삶의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변시지는 인생 후반 38년간을 제주에서 칩거하다시피 했다. 때문에 ‘변시지’만의 독창적 화풍이 담긴 제주시기의 많은 작품들이 이번처럼 한달간이나 서울 중앙 화단에 제대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년 전 서울 성수동의 에스팩토리 전시가 있긴 했으나 전시 기간이 단 5일에 그쳐, 이번 전시에 대한 애호가들의 반가움은 적지 않다.
개막일인 지난 16일 전시장에는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과 이정용 사장, 양의숙 예나르제주공예박물관장 , 조각가 전뢰진, 화가 고영훈, 김종근 미술평론가와 이인범 상명대교수 등이 와서 변시지의 출품작을 감상했다.
제주의 태풍과 바람을 담은 변시지의 그림에 관객들은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제주의 거센 바람, 출렁이는 바다, 나부끼는 들판과 소나무, 고독한 사내와 집, 말, 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듯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고 표현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고독한 사내는 평생 지팡이를 벗해야 했던 작가의 분신에 다름 아니다.
고독 속에 한 점 찍기
마치 이런 관람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이 작가는 작가노트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언젠가는 점 하나로 제주를 표현하고 싶다”고도 썼는데, 작품 ‘점 하나’는 하늘과 바다, 태양까지 온통 황금빛 노란색이 물결치는 작품이다. 바로 그 위에 작은 돛단배 한척이 하나의 점처럼 있다.
그에게 바람은 어떤 의미였을까. 분명 '물리적'인 바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의 바람’ 이기도 했을 것이다. 송정희 공간누보 대표는 “지역의 풍토 자체가 외부로부터 많은 위협과 압력이 주어지는 곳에서 생존하고자 몸부림쳤던 상황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소재가 바람이었을 것”이라 말한다.
개막한 16일에 전시를 관람한 이인범 교수는 “변시지 화백은 제주로 귀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최고의 그림 값'을 받던 분이었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과 명확한 태도가 있던 대단한 분이었다. 작품 제작 연도에 따라 작품 세계가 변화가 있어서 작품 연도를 참고하며 작품 세계를 감상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근 평론가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뼈에 사무치는 고독감이 아프게 올라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17일 전시장을 찾은 노광 작가는 “변 화백님 생전에 작품 한두점 정도 보다가 사후에 개인전으로 많은 작품을 이렇게 보니 참 반가웠다”면서 “작가의 의식세계와 예술철학을 함축적이고도 진지하게 다시 공부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세한도'가 연상되는 작품까지, 정말 훌륭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푹 빠지는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정점에 섰던 일본 시절
제주 출생인 변시지는 6세에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이주했다.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서양화의 계보를 잇는 일본 화단의 거장인 도쿄대 교수 데라우치 만지로(1890-1964)의 문하생이 되었다. 사실주의 기법과 후기 인상파의 표현 요소들을 익히며 전업작가로 나섰던 그는, 23세의 나이로 일본의 대표적인 공모전인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100여년 역사의 광풍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듬해인 24세때는 심사위원까지 지냈다. 일본화단에서 서양화가로서의 정상의 영예를 누렸던 그는, 1957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던 차에 서울대 교수로 초빙되어 30대 중반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본시절(1931-1957) 그의 화풍은 데라우치 만지로의 영향으로 후기인상파의 표현주의 기법으로 인물화와 풍경화에 집중했다. 그러나 1957년 귀국 후 한국의 미(美)에 눈을 뜨면서 비원을 소재로 밝고 섬세한 푸른색 톤의 사실주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정체성 찾아 영구 귀국, 서울서 제주로
그러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그림을 추구하던 그는 다시한번 변신을 시도한다. 서울시절(1957-1975)을 접고, 자신의 뿌리인 제주도로 오십 나이에 낙향하게 된다. 제주로 귀향한 변 화백은 작렬하는 제주의 태양과 바다, 수평선, 말, 소나무, 초가집, 조각배 등을 소재로 풍토의 원형인 화풍에 집중한다. 그리고 생애 끝까지 38년간 독창적인 화풍을 정립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이 바로 제주시절(1975-2013) 그림들이다. 작가는 제주에 정착한 초기(1975-985)에는 제주의 풍광뿐 아니라 제주의 역사, 문화, 신화 속 상징적 소재들을 그린다. 까마귀, 돌하르방, 돌담, 말, 초가집 등이 그것이다. 작품은 후반에 갈수록 더 간결해진다.
제주 중기(1986-1999)에는 ‘폭풍의 바다’ ‘제주바다’ ‘태풍’ ‘바람’ ‘해풍’ 등의 강렬한 황갈색 작품세계로 '폭풍의
화가’라 불리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제주 시절 그는, 우리 정서에 어울리는 검은색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작가노트에 묘사하기도 했다. 극적이고 강한 표현력, 검은 먹빛이 눈길을 끄는 ‘검은 바다’ 시리즈도 이 시기 작품들이다.
후기(2000-2013)로 갈수록 그의 화법은 과감한 여백과 생략을 추구한다. 이전까지 그의 화풍이 서양 유화의 덧입히고 채워간 과정이었다면, 생애 후반 작품은 덜어내고 비워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상은 단순화되고 추상의 개념까지 보인다. 색채는 한층 밝아져 황갈색은 황금빛의 찬란한 노란색으로 보인다.
말년에는 황금빛에 단순미와 추상미 보여
변시지는 절정의 인기도 명예도 내려놓는 고통을 감내했다. 일본 도쿄, 귀국해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민족예술에 대한 정신, 한국 미술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서양화적 기법과 문인화 정신을 반영했다. 또 제주지역작가라는 풍토성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았다. 인간이 갖는 궁극적인 고독함, 저항정신, 자연에 대한 성찰을 잘 표현했다.
안진희 박사는 변시지 작품에 대해 논문에서 “서양의 기법에서 시작하여 오랜 실험과 탐색을 거친 후, 동양의 정신과 기법을 수용한 결과물들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풍경화가 아니라, 동양의 문인화 정신을 반영한 한 편의 시다”라고 표현했다.
세계적이고 싶다면 가장 자기다운 것이 먼저이다. 변시지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상설전시를 진행했던 캐롤 니브스(Carole Neves) 박사는 “우리는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한국 예술가를 찾지 않는다...제주성을 그린 변시지의 표현을 보면 그는 지역적인 특성에서 영감을 받았다...변시지는 국제적으로 눈에 띄고 있고 인정받는다는 점, 그리고 워싱턴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예술과 경이로운 작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반도 최남단의 제주 일본 도쿄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제주 속으로 들어갔던 작가는, 진정한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했다. 자신의 뿌리로 내려가 가장 ‘나’다운 것, 가장 ‘제주’ 다운 것을 고민했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변시지는 제주로 귀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석양에 물든 제주 바다와 대지를 내려다보며 온통 노란색으로 승화되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세한도' 사랑...기당과의 인연
작가는 탈법(脫法)과 진화를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화법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서양화가로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동양정신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그의 황토빛 사상은 더 깊어진다. 또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한학과 서예를 접했던 그는 동양미의 관찰에도 깊이 심취했다고 한다.
한편 변시지의 작품이 상설전시되고 있는 제주 기당미술관이 설립된 배경에는 아름다운 미담이 숨어 있다. 바로 변시지와 기당 강구범과의 인연이다. 변정훈 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기당 강구범은 변시지의 사촌형이다. 변시지가 1948년 일본 화단의 광풍회 최고상을 수상한 덕분에 광풍회 전시에 VIP로 특별 초대를 받았던 기당은 당시 변시지에게 “소원 한가지를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변시지는 소원을 말하지 않고 세월이 흘렀다. 쏜살같이 40년 세월이 흐른 후 기당이 변시지를 찾았다. 죽기 전에 약속을 지키겠노라며 '소원'을 물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변시지는 '미술관 건립'을 말했고, 기당은 당시 10억원을 쾌척했다. 당시 변시지는 자신의 개인미술관 건립을 소원할 수도 있었을 법하지만, 대인배답게 제주민을 위한 미술관 건립을 원했다. 국내 최초의 시립미술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