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회색 당나귀의 인간 세상 여행기. 로베르 브레송의 걸작 <당나귀 발타자르>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19번째 장편 영화다. 제75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수상했다.
이자벨 위페르의 존재감
폴란드의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가련한 눈망울의 회색 당나귀 EO는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서커스단이 폐쇄되면서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에 오른다. 평화로운 농장, 훌리건으로 가득한 축구장, 공포의 소시지 공장, 쇠락 직전의 저택 등 다양한 공간을 오가며 겪은 인간 세계는 다정하면서도 잔혹하다.
거장다운 면모가 돋보이는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비주얼과 사운드,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당나귀의 뛰어난 연기 앙상블, 그리고 환경과 동물권 문제에 대한 날카롭고 진중한 메시지를 앞세운 <당나귀 EO>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후 제 70회 멜버른국제영화제, 제 46회 홍콩국제영화제, 제 4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 66회 BFI 런던영화제, 제 60회 뉴욕영화제 등 무려 21관왕 및 55회 노미네이션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올해로 데뷔 53주년을 맞은 이자벨 위페르는 장-뤽 고다르, 미카엘 하네케, 폴 버호벤 등 거장 감독들과 쉴 새 없이 협업하며 무려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배우다. 그중 <비올렛 노지에르>와 <피아니스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하고, <여자 이야기>와 <의식>으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또한 2회 수상한 데 이어, <8명의 여인들>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까지 거머쥐며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총 5회나 개인상을 수상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아무르>, <다가오는 것들>, <엘르> 등 아트하우스 히트작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이자벨 위페르는 최근 <다른 나라에서>, <클레어의 카메라>에 이어 홍상수 감독과의 세 번째 협업을 발표하며 영화 팬들 사이에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당나귀 EO>에서 쇠락 직전의 저택에 머물며 의붓아들과 미스터리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는 백작부인으로 등장해 존재감을 발산한다. 이 외에도 산드라 지말스카, 로렌조 주르졸로, 마테우시 코스치우키에비치, 사베리오 파브리 등 폴란드와 이탈리아의 대표 배우들이 등장해 좋은 연기를 펼친다.
여섯 당나귀의 흡인력있는 연기
당나귀의 연기 또한 인상적이다. <당나귀 EO>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과 에바 피아스코프스카 작가의 세 번째 협업 작품으로, 에바 피아스코프스카의 초기 아이디어와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향한 깊은 경외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캐스팅을 위해 당나귀들의 사진을 꼼꼼하게 살펴보던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눈을 사로잡은 건 아담한 크기와 회색빛 털이 특징인 사르데나 당나귀였다. 그중에서도 눈 주위에 흰색 무늬가 있는 당나귀 ‘타코’를 발견해 냈고, 그와 유사한 다섯 마리의 당나귀 홀라, 마리에타, 에토레, 로코, 멜라를 추가로 캐스팅한 뒤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동물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답게 영화나 드라마 등에 출연하는 동물을 섭외하고, 촬영장에서 정서적으로 안정시키며, 촬영이 시작되면 잘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동물 랭글러 아가타 코르도스를 중심으로 동물 보호법 준수와 동물권 존중을 최우선으로 하여 촬영이 진행됐다. 촬영 시간은 절대로 8시간을 넘기지 않았으며, 특히, 밤에는 가능한 한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또한,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숲, 물, 비, 각기 다른 토양 등 다양한 환경 조건에 충분히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안장을 얻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방법이나 수레를 끄는 방법도 미리 학습했다. 촬영 현장에 수의사가 상시 대기하며 당나귀들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했고, 준비 단계와 촬영 과정 중 휴식 시간도 부족하지 않게 부여했다. 이 같은 환경은 철학의 진정성 뿐만아니라 당나귀 캐릭터의 표현을 이끌어내는데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