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필리핀 이민자 조이가 부유한 대저택에 간병인으로 일하며 상상도 하지 못한 비밀과 마주하게 되는 미스터리 스릴러. 미국의 종합 예술 축제인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필름 페스티벌에서 극영화부문 심사위원상을 비롯해 2관왕, 뇌샤텔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3관왕, 로스앤젤레스 아시안 퍼시픽 영화제 장편영화경쟁부문 연기상을 수상했다.
사회 문제를 장르 문법으로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영국에 불법체류 중인 조이는 한 대저택의 주인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입주 가정부 제안을 받는다. 비자 문제를 해결할 돈과 거처가 필요한 조이는 딸 그레이스를 짐 가방에 숨겨 대저택에 들어간다. 행운이라고만 여겼던 좋은 일자리. 하지만 조이는 저택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을 목격하게 되고 집주인에게서 위협을 느낀다. 집을 나가기 전에 조이는 자신의 양심과 정의에 따른 ‘시키지 않은 일’을 시도한다.
개성 있는 단편으로 런던 이스트 엔드 영화제, 로스앤젤레스 아시안 퍼시픽 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수상을 기록하며 주목받은 패리스 자실라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를 비롯한 유수의 아시아 영화제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맥스 에이겐만이 주인공 조이 역을 맡았다.
호러 미스테리라는 장르적 문법으로 계층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로 <기생충>이 연상되기도 하고 아시아 이민자를 다룬다는 점에서 <미나리>를 떠올릴 수도 있다. 영국식 대저택의 비밀이라는 설정을 비롯해 <겟 아웃> 류의 형식이나 메시지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필리핀계 영국인 패리스 자실라 감독의 시각으로 영국 내 필리핀 이민자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색다른 지점이 있다.
아시아계 이민자의 정체성
영화는 백인들의 필리핀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하위 계층의 굴욕감 등이 직설적으로 묘사되며,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이라는 시의 일부를 인용해 챕터별 문구로 사용하는 등 지배계층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정글북>으로 유명한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1899년에 발표한 시 <백인의 짐>은 미국인들에게 필리핀을 정복하고 통치할 것을 권하는 내용으로 백인인 화자의 인종적 편견과 우월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인종적 상처를 고발함과 동시에 영화는 필리핀 사람들의 육성을 기반으로 제작한 함성과 노이즈 효과, 필리핀의 전통악기인 ‘쿨린탕’과 민속무용 ‘티니클링’을 활용한 음악 및 사운드를 비롯한 필리핀 문화에 대한 묘사 등을 통해 정체성의 복원과 회복이라는 갈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표현 방식이 투박하지만 그동안 화자의 위치에 놓인 적이 거의 없었던 아시아 이민자의 시점으로 생각해보면 직선적 비판과 분노도 나쁘지 않다. 백인들이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일방적으로 미화한 평등한 관계라는 환상, 또는 계층적 차이를 뛰어넘는 유대감이라는 착각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보여주는 대목이 특히 매력적이다.
‘뒤집힌 화자’가 주는 매력에 비해 연출적 신선함이나 전복적 감성은 기대보다 강렬하지 않다. 영화는 신예감독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장르적 쾌감이나 시나리오의 반전 등 재기발랄함보다는 백인 상류층 가정의 가사도우미라는 그 신분마저 상징적인 필리핀 이민자의 특수성에 기반한 사회적 이야기가 돋보이는 편이다.
장르나 메시지를 고려하면 조금 더 공격적인 편이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지만, 궁극적으로 온화하거나 낙천적 정서가 이 영화의 색깔이다. 부모 세대의 폭력적 역사와 그로 인해 형성된 불평등한 관계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가해자의 반성, 또는 피해자의 복수를 해법으로 제시했다면, <레이징 그레이스>는 두 가지 모두를 피해 성장형 캐릭터로 해법을 제시하는 점이 차별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