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가 본관에 마련한 김기린 개인전 ‘무언의 영역’은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이다. 작고 이후 첫 개인전이다. 작업 초기부터 2021년 작고할 때까지 지속한 작품 40여 점과 직접 창작한 시와 사진 자료 등의 아카이브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갤러리현대는 ‘단색화의 선구자’에 방점을 찍었다.
단색화는 1975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5인의 한국 작가들, 다섯 가지 흰색’ 전이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경향인 단색화의 시발점으로 통했다. 당시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권영우, 윤형근, 정상화 등이 대표작가로 꼽힌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는 도쿄 전시보다 몇 년 앞선 1970년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설치함으로써 김기린을 ‘단색화의 선구자’로 칭한다.
김기린의 작품 세계를 집약하는 핵심은 작가의 내면을 외부에서부터 인식할 수 있도록 캔버스 화면 위에 물감을 매체로써 다뤘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일반적인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내면과 세계의 이면을 엄격하게 선별된 함축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시인의 시 창작과 유사한 방법론이다.
얆은 붓으로 격자 그리드를 완성한 뒤, 수행하듯 굵은 붓으로 원을 수십 번 덧칠한다. 작가는 매번 같은 붓으로 같은 점을 찍지만, 미세한 손떨림, 호흡, 온도와 습도 등의 외부환경까지 같을 수는 없어서 원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잔잔한 음의 진동이 촉각적으로 전해지며 음악적인 맥락을 체험할 수 있다.
김기린은 한국 화단의 화가들과는 결을 달리하며 전통적인 회화 재료인 ‘캔버스에 유채’를 사용하여 몰입의 순간을 연출하는 색과 빛의 관계를 탐구했다. 전시 제목 ‘무언의 영역(Undeclared Fields)’은 사이먼 몰리의 에세이 ‘무언의 메시지 (Undeclared Messages)’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김기린은 ‘회화야말로 인간의 감성을 가장 잘 전달하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했다. 1950년에 고향인 함경남도 고원을 떠난 그는, 다시 가보지 못한 고향에 대한 향수를 품은 채 살았다. 생전 그는 문창호지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달빛 밝은 밤, 어슴푸레 투명한 어둠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작가는 한국의 덧문 위에 붙은 창호지에는 ‘색’이 없으며, 그 대신 어둠과 밝음이라는 빛의 근원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에게 문창호지를 통한 경험은 밝음과 어둠을 지각하게 하는,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빛으로 체험하는 규정되지 않은 장(場), 즉 영역이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청년 김기린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내면의 세계와 파리에서 경험한 다양한 장르의 문화적 자극을 캔버스 위에 텍스트가 아닌 물감의 양감으로 표현했다. 그가 캔버스에 붓으로 올린 것이 기름기를 제거한 유화 물감 덩어리로 누군가에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캔버스를 마주하게 될 관객의 지각과 의식의 흐름을 인도하는 장치로서의 열린 장(space)이었다. 그의 회화는 빛에 따라 화면 안에 구성된 색면과 점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거나 혹은 물감 덩어리의 양감에 따라 다르게 반사되어 보이는 캔버스라는 화면을 통해 인간의 몸이 지각 가능한 2차원, 3차원을 넘어서는 지각의 세계에 대한 탐구의 흔적이 가득한 장이다.
그는 그림을 ‘하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색을 놓지, 바르지 않으며 점과 줄을 팠지, 찍거나 긋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그림의 과정이 ‘제조’의 개념이기보다 ‘인식 작용’을 수반한 ‘실천’의 의미로 있는 것이다. 즉, 작가의 에너지가 담긴 그림은 관객을 만나 살아있는 작품이 된다.
김기린은 회화의 표면을 일종의 살아 숨 쉬는 온도와 습도와 빛의 파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피부라 설명한다. 비슷한 그리드 패턴에 같은 붓으로 똑같은 점을 찍는다고 하지만, 매 순간마다 붓 터치는 같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도톨도톨한 질감은 빛의 파장이 닿는 속도와 강도에 영향을 미쳐 감상자로 하여금 섬세한 지각의 세계로 인도한다. 얼핏 봐서는 그저 단순한 색면인가 싶지만, 가볍고도 잔잔한 음의 진동이 촉각적으로 전해진다.
김기린의 회화는 음악이 추상 언어를 통해 본질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맥락을 지향하는 지점이 있다. 200호 이상의 대작을 할 때, 작가는 똑같은 점을 찍어 내려가면서 다음 겹의 점을 찍을 때까지 유화가 마르기를 기다려 두 번째, 세 번째…서른 번째 점을 찍 노라면, 1~2년의 세월이 흐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두께와 깊이의 색점은 빛이 닿아서 튀어 나가는 파장의 속도가 각각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화면을 마주하면, 운율감 있게 이어진 광채가 다른 다채로운 도톨도톨한 점들의 변주를 감상하게 된다. 김기린은 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에서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에서는 노란색을,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는 회색,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을 들을 때면 녹색이 떠오른다고 술회한 바 있다. 김기린은 음에서 빛깔을 본다고, 모국어가 아닌 불어로는 충만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지각의 세계를 색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전시장 1층에는 검정색 안료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김기린의 1970년대 대표작 ‘흑단색화’와 2000년대 까지 지속된 ‘안과 밖’ 연작이 걸렸다. 2층은 생전 전시에서 공개한 적 없는 한국 전통 창호지를 연상시키는 유화 작업을 중심으로, 유학 시절 작가가 직접 창작한 시가 소개되어있다. 또 전성기 시절의 소품은 물론, 전업 미술품복원가로 생계를 꾸리는 동시에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의 파리 시기 아카이브 자료 또한 함께 전시되었다.
김기린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프랑스로 이주하여 디종 대학교(현재 부르고뉴 대학교, Université de Bourgogne)에서 미술사를 수학했으며,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로저 샤스텔 (Roger Chastel) 교수 아래서 미술 지도를 받고,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에서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말부터 서정적인 추상 회화를 시작하여 검은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평면성을 추구하는 회화 작업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흑단색화 작업만을 소개하는 파리에서의 개인전이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면서 작가는 한국의 단색조 회화 운동에 영향을 끼치며, 모노크롬 작업을 심화시켜 나갔다.
한편, 김기린은 갤러리현대, 우종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국제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도쿄도립미술관, 도쿄센트럴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가졌고, 대표작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우종미술관, 리움미술관, 파리시립현대미술관, 디종미술관 등 국내외 다양한 기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14일까지 계속된다.
〈사진 =이화순, 갤러리현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