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는 존재이다.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은 마음의 일이다. 살다 보면 살아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에서 나날이 작아지는 자아를 끌어안는 일이다. ‘다 소용없다.’ 하면서도 주어진 오늘의 의무를 열심히 실천하면서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게 마음이다. 멀리 보면 삶은 특별한 무엇이 없다. 열등감이나 우월감도, 지배 욕망의 쾌락이나 피해 의식의 굴욕도 마음의 일이고, 시간 속에서 희미해진다. 사람은 몸이 있어서 살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벌고 사랑하고 이해한다. ‘돈’은 조직 내 갑을 권력을 따르거나, 인간관계의 위계를 지키면서 벌어들인 결과물이다. 삶은 주어진 사회 질서에 적응하는 자만 살아남는 경쟁이다. 말로는 평등해도 사회생활은 우열과 상하 위계가 있다. 평등은 이데아일 뿐, 인간사회는 위계와 차별로 움직인다. 사회는 ‘다 같이 잘살기’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승자 독식이거나 패자부활전이 없는 시스템이다. 능력이나 노력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태어나게 해준 부모의 지위로 삶이 결정된다. 멀리 보면 사회가 정의와 평등으로 나아가지만, 가까이 보면 일 개인의 삶은 불공정과 차별로 점철되며, 그런 가슴 아픈 일을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문제 상황에 대해서 자기 혼자 헤쳐나가는 존재이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사람들과 엮여 살지만, 막상 자기 앞에 닥친 문제는 자기 홀로 해결하며 산다. 살기 위한 의식주 문제도 홀로 해결하고, 공부도 혼자 하고, 연애도, 취업도, 병듦도, 건강관리도 혼자 경험하고 혼자 해결하면서 산다. 사회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배경일 뿐, 주어진 사회에 적응할지 말지는 개인 혼자만의 결단과 의지이다. 개인은 여럿이 함께 사는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건강관리 하는 일은 혼자 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여럿에 속해 여럿과 비슷하게 살고 있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오늘 할 일이나 오늘의 인간관계는 혼자 해결한다. 여럿의 조언은 참고일 뿐, 어떤 일이나 관계를 결정해서 행동하는 선택은 개인 혼자만의 일이다. 살기 위해 가족, 학교, 사회, 직장에 협력하지만, 개인 내면의 문제나 개인 몸의 문제는 개인이 혼자 해결하는 숙제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가난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거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거나 없다면, 그 개인은 스스로 독학하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혼자서 해결한다. 개인이 사회에
명리학적 운명론 운명(運命)의 사전적 의미가 ‘정해져 있어서 반드시 그렇게 된다’라는 의미라면, 명리학(命理學)의 운명론은 필연적 운명론이 아니다. 명리학의 운명론은 ‘내 자유의지’로 바꿀 수 있다. 사주(생일)는 타고난 명(命)으로 정해져 있어도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들어오는 기운에 따라 변화하기에 사주(四柱)는 고정된 길을 가지 않는다. 사주는 주어진 환경에서 만나는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바뀌기에 ‘변화 그 자체’가 운명이다. 들어오는 운(運)은 도로이고, 운의 도로를 가는 자동차가 사주이다. 각양각색의 도로를 주어진 자동차(사주)로 어떻게 갈지는 ‘내 자유의지’이다. 사주라는 자동차를 가지고 행운의 도로를 갈지, 불운의 도로를 갈지는 ‘내 자유의지’이다. 명리학은 ‘나’에게 주어진 재물복, 명예복, 수명복, 건강복, 인맥복 정도를 해석하는 재야 학문이다. 이런 오복(五福)이 사주에 있어도 ‘내 자유의지’로 노력해야 복이 된다. 연초(年初)가 되면 몇몇 사람은 띠(태어난 해) 기준으로 삼재(三災:세 가지 재앙)가 있으니 불행한 일이 일어날 거냐고 묻는다. 불행한 일은 손재수, 관재수, 수술수, 소송수, 구설수, 임종이다. 이런 일이 삼재 운이 들어올 때
계묘년(癸卯年)은 검은 토끼해이다. 계수(癸水)는 물로서 검은색이고, 묘목은 토끼띠를 나타내기에, 계묘를 검은 토끼라고 한다. 사주학에서 계수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물로 생명체를 살리는 근원이다. 계묘는 식신(食神)으로 생명체 전체를 살리는 천을귀인(조력자)이다. 식신은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생활력이다. 계묘년 검은 토끼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부지런한 식신이다. 식신은 과시하거나 낭비하지 않는다. 식신은 일하는 행동력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며, 새로운 문물을 창조하는 재능과 기술이다. 그래서 2023년 계묘년에는 서로를 배려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면서 살 것이다. 사주에서 겁재는 힘 자랑으로, 상관은 잘난 척으로, 편재는 돈 자랑을 하는 편인데, 식신은 겸손하게 자기 분수를 지키며 실리적으로 산다. 2023년 계묘년은 토끼띠의 해이다. 토끼는 작지만 귀엽고 활동력과 먹성이 좋고, 나대기도 하지만 겁이 많다. 그래서 계묘년 토끼는 일을 크게 벌이거나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자기 분수를 알고 적정선에서 실제적인 일을 하면서 실용적인 돈을 벌려고 할 것이다. 토끼는 지혜로운 꾀로 위기를 넘기는 동물이므로 2023년 계묘년은 현재의
이스털린 역설이란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이 정체되는 현상으로, 소득이 어느 정도 높아지면 행복도가 높아지지만, 일정 시점이 지나면 행복도는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소득이 높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라는 가설이다. 이스털린은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의 행복 지수가 높고, 부자 나라에서는 행복 지수가 낮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가난한 나라는 모두 가난하기에 박탈감이나 양극화로 인한 불행감을 느끼는 비교의식이 약하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부자 나라는 국민의 빈부격차가 너무 심해서 박탈감과 불행감을 자주 느낀다는 의미이다. 이스털린 역설에 의하면 행복감은 비교의식의 결과물이라는 의미이다. ‘내’가 ‘남’과 비교해서 조금 더 고통지수가 낮다면, 행복감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이런 행복감은 상대적 비교의식에서 생기는 것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로 남과 비교해서 더 가졌다는 생각이 들 때 느끼는 감정이며, 일종의 우월감으로 자기가 열등감을 느낄 때는 사라진다. 이렇게 행복감은 누구와 비교해서 더 가졌다는 기준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자기만족이나 자기 존중 같은 개인 내면의 절대적 행복감도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비교의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 비교
현대인에게 어쩌면 삶의 가치는 먹고살기와 몸의 건강함이 다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GDP 숫자가 높아져도 만족을 모르고 먹고살기와 몸의 건강함만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남이 조금 더 가진 것에 불행감을 느끼면서, 바로 옆에 있는 남보다 조금 더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에 복고주의가 유행한다. 드라마나 패션에서 옛날의 풍습을 현대에 맞게 재창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주로 외양을 복고하며 약간 변형해서 유행시키고 있다. 복고주의 때문에 ‘옛날’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부정적으로는 ‘나 때는 말이야’를 ‘라떼는 말야’라고 하며 꼰대 문화를 패러디하기도 한다. 그런데 옛날에는 지금처럼 이렇게까지 무한 경쟁을 하지 않았다. 너도나도 부동산 투기에 주식 투기, 한탕주의 같은 돈 욕심이 지금처럼 난무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돈 말고도 ‘사람’을 가치로 생각했다. 돈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여기며 윤리적으로 낮게 취급했다. ‘돈보다는 사람’이라는 암묵적 도덕이 마음의 심연에 있었다. 지금 시대는 마음조차 돈으로 환산하고 품앗이하듯이 “좋아요” 같은 엄지척의 이모티콘을 가볍게 날린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