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영은 영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요 4:24). 우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마음을 알아서 그 뜻에 맞게 구해야 하는데, 이러한 마음과 응답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일곱 영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영이 일곱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하다’는 의미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을 측정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믿음대로 되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면 마음에서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식으로만 아는 육적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마음에서 의심 없이 믿는 믿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을 믿지요. 이러한 영적인 믿음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버리고 성결되는 만큼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영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은
낡고 오래된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눅 5:37).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요한복음 15:1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이며,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
2천여 년 전, 온 인류의 기쁨과 소망이 되시는 구세주가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에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선물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황금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귀금속 중의 하나로서 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6:21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즉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의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42을 보면,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던 가난한 과부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가난하여 두 렙돈밖에 안 되는 적은 돈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것, 할 수 없는 중에도 하
그릇 됨됨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마음 됨됨이가 있는데 이는 얼마나 마음을 넓혀 사용하는가 하는 차원입니다. 그릇 됨됨이가 그릇의 재질과 관계가 있다면, 마음 됨됨이는 그릇의 크기와 관련이 있으며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해야 할 것 이상으로 해내는 경우입니다. 마음 됨됨이가 좋은 그릇이지요. 일례로, 부모가 방 안에 떨어진 휴지를 주우라고 하면 휴지를 주울 뿐 아니라 방 안 구석구석까지 청소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부모의 기대 이상으로 행했기 때문에 흡족함과 기쁨을 줍니다.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는 평신도였지만 주의 종에 못지않은 마음 됨됨이로 성결하고 충성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고 집사임에도 불구하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해야 할 것만 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확실하게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는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부모가 휴지를 주우라 하면 휴지만 줍는 경우입니다. 물론 순종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지만 그 이상으로 기쁨이 되지는 못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라는 열매를 얻고자 아담과 하와라는 첫 번째 씨를 심으셨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불순종하여 타락할 것과 이로 인해 근심하게 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여 악을 버리며 그분의 마음을 닮은 참 자녀가 나올 것을 알기에 끝까지 사랑으로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흙의 속성과 닮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흙은 새로운 생명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성질이 있어서 밭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흙은 어떠한 성분을 가미하느냐에 따라 토질이 바뀝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짜증이나 화를 잘 내는 경우 점점 혈기가 많은 토질로, 거짓말을 잘하는 경우 거짓된 속성이 강한 토질로 바뀝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은 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육에 속한 사람이 되어 급속히 비진리로 물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마음밭을 개간하여 다시 영으로 회복해야 하는 경작 과정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경작받는 목적은 마음밭을 개간하여 아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긍휼이란 영적으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망 없어 보이는 영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원을 얻게 하려는 마음이지요.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서 상대의 입장과 마음이 되어 주어야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지혜, 구원의 길로 이끄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지혜로 지친 영혼에게 힘을 주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긍휼을 베풀었을 때 얻어지는 모든 열매가 선한 열매이므로 긍휼과 선한 열매는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그런데 긍휼은 단지 불쌍히 여기고 귀히 여기는 마음만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용서도 하고, 징계도 하며, 때를 좇아 구제도 합니다. 에베소서 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겨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와 징계는
‘양순’은 영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향이 말과 행함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선하다 해서 단순히 착하고 부드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강하고 담대하지요. 영적인 선과 진리로 가득 찬 마음에는 어둠을 물리치는 빛의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 수 있고 마음을 다스리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할 때 성령으로 분별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깊은 선의 차원입니다. 그러면 양순의 특징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진리로 문제의 핵심을 분별해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산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모의 유산을 공평히 나누도록 자신의 형에게 권면해 달라고 하지요(눅 12장).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십니다. 탐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후로도 형제간에 감정 상할 일이 생길 수 있고, 탐심을 버릴 때라야 하나님께서도 물질의 축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깨우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답변해
바둑 둘 때 훈수하는 사람이 세 수를 더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직접 두는 사람은 심리적 부담으로 쉬운 것도 못 보는 수가 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승패에 대한 부담이 없어 그만큼 여유가 있고 시야가 넓어지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할 때에는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안다 해도 눈앞의 유익에 집착하면 진리대로 행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채우면 옳은 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고, 진리를 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답을 제시해 줄 수 있지요. 이것이 바로 관용의 열매로 얻는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관용의 영적 의미는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으므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다 내어주기 위해서는 사심이 없고 진리가 마음에 가득해야 합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람의 행함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가축이 많아지자 아브람과 조카 롯의 목자들 사이에 풀과 물을 얻기 위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아브람
가정이나 학교, 직장, 사업터 등 자신이 속한 분야마다 아름답게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마음을 하나로 모아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것이 지혜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식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데도 겸손하여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만하여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지요.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가졌다 해도 상대를 무시하고 화평을 깨뜨리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고 오히려 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조광조라는 인물은 왕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과감한 개혁 정책을 단행하려 했습니다. 그는 소신이 뚜렷하고 열정이 있었기에 왕도 처음에는 그를 힘껏 밀어주었고, 백성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일을 추진해가니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그를 지지하던 왕조차 외면하고 말았지요. 결국 그는 개혁 정책을 실행해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는 것과 흡사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이 성결의 기본 조건이듯이 하늘의 지혜도 마음이 선한 만큼 더 섬세하고 깊이 받을 수 있습니다.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항상 선한 방법으로 나옵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누군가 선한 지혜를 알려 준다 해도 그 방법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마음의 악을 버리는 것이 지혜를 받고 지혜가 주는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은 대화할 때에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선한 표현을 씁니다. 곱고 은혜로운 말, 누가 들어도 덕스러운 말을 하지요.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표현은 하지 않고, 선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선하고 덕스러운 말이나 선한 기도는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은연중에 악이 배어나오지요. 반대로 마음이 선하면 자연히 선한 기도,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나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나 말로 인해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은 선한 의도로 말했는데 도리어 난처한 입장에 놓이거나 비방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럴 때에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보다
사람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건강과 장수, 명예와 권세, 부귀와 영화, 지식과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과연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삶의 지혜가 기록된 잠언 3:13~17을 보면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 4:7),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교훈합니다. 악하고 간교한 꾀도 지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수 없으니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반면 선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받으면 모든 일에 형통하며 가정이나 학교, 직장 등 자신이 있는 곳에서 사랑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 했는데, 여기서 “위로부터 난 지혜”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선하신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일을 피해 갈 수 있고, 혹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잘 극복하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3:18에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말할 때 제갈공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 삼국 시대의 지략가로서, 앞일을 정확히 내다보았으며 천기를 읽고 바람의 방향까지 바꾸었습니다. 유비는 덕이 있어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지만 지혜가 부족했기에 오랜 세월 확실한 기반을 잡지 못했습니다. 지략가를 물색하던 유비는 마침내 제갈공명을 만나 그의 지혜를 따른 결과, 전쟁마다 승리하고 때를 따라 적과 화친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제갈공명은 어떻게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신을 인정하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욕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의를 위해 재능을 사용하니 명철의 길도 훤히 보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를 지닌 인재가 더욱 요구됩니다. 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학문을 통해 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