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촉발된 물류대란으로 정부와 해운업계가 쌓아온 국내 해운사업은 물론 국가적 신뢰가 한 번에 추락할 수 있는 일보직전의 상황에 몰려 있다. 가뜩이나 조선업 구조조정 여파로 고용시장이 얼어붙은 가운데 한진해운이 촉발한 물류대란 사태 때문에 수출 전망까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물류대란은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돌입하면서 일어났다. 세계 항구에서는 회생절차를 밟는 한진해운 선박을 받기를 꺼려하고 있다. 결국 발이 묶인 수많은 선원들은 난민처럼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상태다.
물류대란에 '뒷북'치는 무능한 정부
물류대란은 대한항공과 산업은행의 긴급 자금 투입으로 당장 숨통을 트일 순 있게 됐지만, 이번 사태는 기업의 무책임과 정부의 무능이 빚어진 인재(人災)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정부가 일찌감치 조선·해운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해 놓고 뒷짐만 지고 있다가 물류대란이 현실화되자 허겁지겁 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이번 한진해운 사태는 과거 대한해운과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대한해운은 지난 2011년 1월, STX팬오션은 2013년 6월 각각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당시 이 회사들 또한 국내 해운업계 순위 3, 4위를 다툴 정도로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대한해운은 법정관리 신청 때 180여척의 선박을, STX팬오션도 100척 넘는 선박을 운영했다. 그러나 별다른 물류대란 소동은 크게 빚어지지 않았다.
이에 정부가 과거 STX팬오션과 대한해운의 법정관리 경험을 가지고 한진해운 법정관리를 너무 안이하게 본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STX팬오션은 컨테이너선 규모가 5%밖에 안됐고 대한해운은 벌크선 사업만 했기 때문에 컨테이너선 사업이 95%인 한진해운과는 대응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간 업계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앞두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해 왔다. 또 부산상공회의소는 물론 해운관련 업계에서는 한진해운이 퇴출될 경우 최대 17조원의 손실이 발생하고 2300개의 일자리가 증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결국 정부가 확실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출 물류대란은 현실화됐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수출 기업들에게 돌아갔다. 정부는 한진해운이 국내 물동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에 불과하다며 법정관리에 따른 여파를 과소평가했지만, 현장에서는 수송선박 확보 차질로 어려움을 겪는 수출 기업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당장의 화물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한진해운의 정상적인 영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해운·수출업계에서는 알맹이가 빠진 반쪽자리 대책이라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국 정부의 안이한 대응은 사태 수습이 아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물류대란 사태의 책임을 모두 한진그룹에만 떠넘겼다. 물류대란에 따른 피해 예상 규모가 수조원대에 달해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임에도 정부는 '대주주가 직접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금융당국이 한진그룹에 대한 여신 파악에 나선 것과 대통령이 '무책임' '도덕적 해이' 등의 서슬 퍼런 단어를 써가며 공개 비판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정작 중요한 법정관리 이후 상황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후폭풍에 대한 대비를 전혀 세우지도 않고 법정관리로 몰고 간 정부에 더욱 큰 책임이 있다"며 "혼란을 수습할 능력조차 없는 '한국 정부의 무능'이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인되는 한진 해운에 의한 물류 대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부의 압박에 밀린 한진그룹은 결국 긴급 수혈에 나섰다. 하지만 물류대란 사태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화주들의 피해가 날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물론 국내 해운업의 대내외 신뢰가 크게 추락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네 탓 공방'에만 열을 올리며 책임 회피의 희생양을 찾기에 분주한 모양새다.
최은영 전 회장 책임론 부상
여전히 안개 속인 한진해운 물류대란 사태와 관련, 한진그룹에 대한 비판여론도 여전하다. 진작부터 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정부가 전방위 압박에 나서자 뒤늦게 마지못해, 그것도 생색내기 정도만을 부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와 한진그룹간 신경전 속에 결국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화주들만 극도의 피해와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정부의 무능과 한진그룹의 비협조적 자세 등이 맞물려 물류대란 사태가 더욱 복잡하게 꼬이고 확산됐다.
업계 안팎에서는 최은영 유수홀딩스(전 한진해운홀딩스) 회장이 외부에서 영입한 경영인의 경영실패가 한진해운 부실의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 회장이 지난 2007년 한진해운 경영권을 승계한 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긴 2014년까지 이 기간 부채비율이 10배(155%→1445%) 가까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탓도 있지만, 2011년을 전후해 무리하게 비싼 용선료를 주고 배를 빌린 것이 화근이 됐다는 분석이다.
아울러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의 후폭풍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피해를 최소화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진해운의 주가는 최근 1년 사이 4분의 1로 토막난 만큼, 충분히 위기상황이란 걸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최은영 전 회장 등의 '부실 경영'이나 도덕성 논란에 대해서 책임을 엄중히 묻는 것은 당연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최 회장은 뒤늦게 전임 경영자로서의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100억원의 사재를 내놓았다. 최 회장의 이번 결정은 시숙인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사재출연, 자신 가족 소유의 재산 규모가 상당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점 등에도 불구하고 한진해운 사태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여론이 거세지고 있는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 한진해운 부실에 따른 책임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한 액수로 비춰지면서 '여론 무마용, 생색내기용'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 회장의 사재 출연으로 최근 들끓었던 '대란 책임론'이 수그러들지, 더불어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자금 확보 급한 불 껐지만…'산 넘어 산'
한진해운 발 물류대란 해소를 위해 대한항공이 600억원 지원을 확정한 데 이어 산업은행 또한 최대 500억원의 자금 수혈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진해운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게 됐다. 다만 당장의 화물 하역 자금이 마련된 것일 뿐 육상운송비와 연체 중인 용선료, 하역비 등을 감안하면 여전히 수천억원의 자금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도 여전하다.
지금까지 한진해운 화물 하역에 투입된 자금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400억원)과 최은영 한진해운 전 회장(100억원) 등 500억원이다. 여기에 대한항공과 산업은행의 지원금 600억원과 500억원을 합하면 총 1600억원의 하역비를 확보한 셈이다. 법원이 애초 한진해운 선박에 실린 화물을 내려놓는 데 필요한 비용을 1700억원 정도로 추산한 만큼 우선은 물류대란으로 막혔던 숨통을 트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금 지원 결정이 늦어지면서 물류 대란 해소에 필요한 자금은 당초 예상보다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진해운은 하역 지체로 하루에만 약 210만 달러(약 24억원)의 용선료와 연료비 채무가 발생하고, 법정관리 이후 발생한 미지급액만 400억원이 넘는 상황이다. 현재 한진해운 선박에 적재된 화물 가액만 약 140억 달러(약 16조원)인데 운송 지연으로 인한 화주의 손해배상채권액만 총 1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진해운으로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회생발판을 본격적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