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유한태 기자] 북한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비운의 황태자 김정남(46)이 2월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됐다. 김정남의 피살은 김정남이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백두혈동’의 장
자였다는 점에서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임과 동시에 탄핵국면에 있는 국내 정치상황에 안보문제가 이슈화 되는 등 신 북풍을 불러오고 있다.
김정남, 10초만에 피살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은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불과 10초만에 살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중국어 신문 동방일보(東方日報)는 쿠알라룸푸르 경찰청의 고위 간부를 인용해 김정남은 예약한 항공편에 탑승하기 위해 이륙 1시간 전인 오전 9시께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터미널에 있었고, 그때 여자 2명이 김정남에 접근했으며 1명이 김정남의 얼굴에 독극물로 추정되는 스프레이를 분사했다고 전했다. 그 직후 다른
여자가 손수건 같은 물건을 꺼내 김정남의 입을 틀어막을 듯이 덮었으며 약 10초가 지난 다음 독극물이 김정남의 기도에 완전히 들어간 사실을 확인하는 동작을 보인 후 도주했다고 밝혔다.
범행 직후 이들이 공항을 빠른 걸음으로 떠나 택시를 타는 모습이 방범 카메라에 찍혔으며 쿠알라룸푸르 공항 관계자는 수법이나 거동으로 보아 범행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2월16일 공식 성명을 통해 이날 새벽 2시께 김정남 피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 용의자 1명을 추가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 여성이 소지하고 있던 여권상 이름은 시티 아이샤(25)로, 여권에는 인도네시아 세랑 출신의 1992년생으로 기재돼 있다.
앞서 말레이 경찰은 전날 오전 베트남 국적 여권을 소지한 29세 여성을 김정남 살해 가담 혐의로 체포, 밤샘 조사를 벌였다. 용의자의 여권상 성명은 ‘도안티흐엉’으로 전해졌다. 이로써 말레이시아 경찰은 김정남 피살에 가담한 여성용의자 2명이 모두 체포된 가운데 그 배후를 쫓고 있다.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 쿰푸란 보도에 따르면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남성이 ‘시티 아이샤’라는 이름의 이 인도네시아 여성이 일하는 나이트클럽에서 그녀에게 접근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도와주면 1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인도네시아 세랑 출신인 아이샤는 이혼녀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가사보조인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헤어진 남편과 함께 2013년에 말레이시아로 들어왔고 지금은 이혼 후 아들과 따로 살고 있다. 텔레그래프는 말레이시아 보안당국 소식통을 인용해 현재 용의자로 지목된 2명의 여성과 도주 중인 4명의 남성은 청부암살자들로, 범행을 공모하기 이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던 사이라고 전했다.
한편 말레이시아당국은 2월15일 김정남 시신을 부검 했으며, 말레이시아 과학기술혁신부 산하 화학국은 경찰로부터 김정남 부검 결과 얻은 샘플들을 현지 시간으로 다음날 저녁 넘겨받았다고 밝혔다. 화학국은 “중요 사건 처리 절차에 따라 가능한 빨리 분석해 결과를 경찰에 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현지 소식통은 “샘플 분석에만 최소 이틀이 걸려 이슬람 주일인 금요일이 지난 주말 이후 결과가 발표될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김정남 살해의 배후는?
현재 말레이시아 당국의 발표와 수사사항을 지켜보면, 김정남 살해의 배후가 북한이라는 명확한 물증은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살해를 직접 실행한 용의자들의 행태와 도주 경로, 체포 이후의 진술태도 등을 짚어볼 때 고도로 훈련된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보기 어려워 보인다.
이와 관련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은 김정남 암살이 북한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이 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 긴급간담회에서 김정남 피살과 관련해 “2012년에 본격적인 피살 시도가 한 번 있었다”며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격이 반영된 것”이라고 밝혔다고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간사가 전했다.
김 의원은 “(김정남 암살은) 김정은 집권 후 스탠딩 오더,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명령이었다고 한다”며 “2012년에 암살 시도가 한 번 있었고 같은 해 4월 김정남이 김정은에게 ‘저와 제 가족을 살려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김정남은 이 서신에서 “저와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해 달라”며 “갈 곳도, 피해갈 곳도 없고 도망갈 곳은 자살 뿐”이라고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김정남의 한국 망명 시도나 요청에 대해서는 “(김정남) 망명에 대한 시도는 (이전 정부나 현 정부 시절에도) 없었다”며 일부에서 제기한 망명 타진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어 “(북한의) 정찰총국 등 정보당국이 지속적으로 암살 기회를 엿보며 준비하고 있었고 결국 오랜 노력의 결과로 이번 암살이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며 “암살 타이밍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김정남이 처신에 위협된다는 계산적 행동보다는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격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국정원은 “앞으로 이런 일(요인 암살)이 계속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북한 내부에 충격을 계속 주기 위해선 일어날 것”이라며 “이 일로 인해 북한 내부 엘리트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일반 인민들은 김정남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2월15일 김정남이 피살된 것과 관련해 사건이 일어난 말레이시아와 진상 파악을 위해 협력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대북감시 태세를 강화하기로 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군은 확고한 한·미 연합방위체제 하에 더욱 강화된 대북대응태세를 유지해주기 바란다”며 “국민들이 정부를 믿고 안심할 수 있도록 정부 각 부처도 긴밀하게 상호 협력하면서 맡은 바 업무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어 “정치권도 정말 안보가 어려운 상황인데 안보에 관한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지원하고 협조해 달라”며 “한 틈의 안보 공백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데 있어 법안의 추진과 정책 협의과정을 통해서, 또 국민들에 대한 메시지를 같이 공유함으로서 안보에 흔들림이 없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시 부는 신 북풍...안보이슈 부각하려는 정치권
한편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등 지지율 정체에 고전하는 보수진영은 이번 북한 김정남 암살사건을 안보이슈로 부각시키고 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2월16일 비대위회의에서 “문재인 후보는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유엔 인권결의안에 대해 북한에 물어보고 기권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며 “개성공단을 재개해서 북한 핵미사일 개발에 들어갈 게 뻔한 현금 달러를 퍼주겠다는 게 바로 민주당”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안보관을 갖고 대통령을 할 수 있겠느냐는 자격에 대한 시비가 있다”며,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안보관을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바른정당 정병국 대표도 전날 “김정은은 2011년 말 집권 이후 공포통치를 통해 자신의 유일 지배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을 숙청해 왔다”며 “1인 권력체제 유지를 위해 아버지의 동지들은 물론 피붙이까지 숙청해나가는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이미 한반도를 넘어 국제사회로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문 전 대표를 겨냥, “북한인권법이 지난해 힘겹게 국회를 통과했는데 인권법의 핵심기능을 수행할 북한인권재단은 수립도 못하고 있다”며 “김정일에게 결재를 받아야 한다던 문재인이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이기 때문은 아닌지 딱하다”고 비판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도 “한미동맹은 물론이고 중국과 협력해 북한 도발을 막는 외교적 역량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북 도발을 막는 최고의 방법은 억제력을 갖는 것이다. 조속히 사드 배치를 추진할 수 있도록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러한 여권의 공세에 대해 “북한 미사일 도발에 이은 김정남 피살로 남북관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며, “이 건으로 어떤 안보장사를 획책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해선 안 된다”고 ‘북풍(北風)’을 경계했다.
문 전 대표도 “우리가 긴장하고 이 사안을 봐야 하지만 혹시라도 안보에 관한 문제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것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안보적폐라고 생각한다”고 색깔론 공세 차단에 주력했다. 그는 “정부와 정보당국은 이 사건과 관련한 어떤 허위나 과장, 축소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경고한다”며 “특히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인만큼 남북관계 및 안보, 국방에 철저한 대비 태세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민의당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김정남 피살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7월 공식 채택한 ‘사드배치 반대 당론’ 재논의에 나서는 한편, 경쟁 후보인 문 전 대표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사드 배치 재논의를 통해 중도와 보수진영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문 전 대표를 집중 공격해 텃밭인 호남 지지율을 되찾아오자는 전략이다. 주승용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2월16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미사일 발사로 우리의 사드배치 반대 명분을 약화시킨 원인을 제공했다”며 당론 재논의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 안철수 전 공동대표도 “이 문제에 초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혀 이러한 재논의 의사에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