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경숙 기자]국립극단의 연극 '국물 있사옵니다'는 근현대 희곡이 근사하고 세련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극작가 이근삼(1929~2003)이 1966년 발표한 작품이다. 상식대로 살고자 했던 평범한 샐러리맨 상범(常凡)의 세속적인 출세기다. 1960년대 후반 산업화에 따른 모순은 현재를 관통한다.
제목 '국물 있사옵니다'는 '국물도 없다'의 비틀기다. 제철회사의 임시사원으로 취직한 상범은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가 되레 그의 발목을 잡았다.
편법과 술수가 점철된 '새로운 상식', 즉 "자리를 양보하느니 발로 걷어차 길을 터야겠다"는 마음을 먹기 시작하자 그에게 국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점차 새로운 상식으로 무장해 가는 상범은 섬뜩하도록 현대인의 모습을 닮았다. 양보, 이해, 관용의 미덕을 갖춘 이들이 오히려 바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시대. 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새 상식'을 넘어 상식을 벗어난 일들을 감행한다.
여기서 아련함이 심장을 지긋이 눌러온다. '국물 있사옵니다'가 현재까지 풍자하는 건 맞다. 하지만 1960~1970년대 물질만능주의와 출세주의 뒷면에는 그래도 인간의 얼굴이 있었다.
점차 성공을 해나갈수록 슬퍼지는 상범의 얼굴이 이를 대변한다. 성공을 위해서 상식을 넘어선 현대인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다.
박완규의 연기는 그래서 빛난다. 우스꽝스러움과 비극을 오가는 상범의 페이소스는 그의 얼굴과 몸짓을 통해 오롯하게 드러낸다. 연민과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다.
초고속 승진을 하고, 사장의 아들과 결혼했다 미망인된 성아미와 결혼하는 등 절정의 환희를 느낄 순간에 눈이 무대를 뒤덮는 가운데 엽총을 어딘가를 향해 겨누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상식을 지키고자 하는 최후의 절박함이다.
결국 '국물 있사옵니다'는 현재를 풍자하는 걸 넘어 반추하게 만든다. 서충식 극단 주변인들 대표의 연출 솜씨가 탁월한 이유다. 해설도 겸하는 상범의 초반 만화 같은 캐릭터를 비롯한 웃음, 상범이 새 상식을 장착한 이후 세대와 맞물리며 생기는 비장함 등을 이완과 긴장을 오가며 능숙하게 조절한다.
무대미술가 박동우가 상범의 욕망을 형상화한 여러개의 계단 식 무대를 활용한 동선 연출도 높이 살 만하다. 다만 결혼에만 매달리는 박용자, 남자를 이용한 뒤 소비만 되는 다방 여자 현소희 등 여성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지 못한데, 이는 작품이 쓰여진 시대의 한계로 보인다.
국립극단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하나다. 김영수의 '혈맥'(4월20일~5월16일 명동예술극장·연출 윤광진), 함세덕의 '산허구리'(10월 8~30일 백성희장민호극장·연출 고선웅)로 이어진다.
'국물 있사옵니다', 24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출연 박완규, 이종무, 임영준, 김정호, 유연수, 우정원. 예술감독 김윤철, 드라마투르기 김옥란, 무대 박동우, 조명 이현지. 러닝타임 110분. 3만원. 국립극단.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