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국회부의장인 이상득(李相得 72)의원이고 동생이 지난12월19일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명박 당선자다.
이 부의장은 6세 연하인 동생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고 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 경위는 매스컴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내리 5선을 한 이 부의장은 이른바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정치인로서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정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때론 폭탄주 권하며 ‘좀 도와주소’ 직소
경선 초반부터 이 부의장은 당내 기반이 약한 이 당선자를 대신 의원과 당원의 설득을 통해 세를 확대시켜 나갔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이상득이 없었으면 이명박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지만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후보경선이 시작하기에 앞서 이 부의장은 전국 구석구석을 돌면서 이 당선자지지를 호소했으며 경선 직후에는 ‘친 박근혜’성향의 의원과 원외 위원장을 골라서 돌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피차 익히 아는 사이이므로 단도직입적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때로는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부은 이른바 ‘폭탄주’를 먼저 자기 입에 털어넣고서 ‘좀 도와주소’라고 화끈하게 부탁하면서 결집해 갔다. 각개 격파식인 이 부탁을 거절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평이다.
더욱 경선 막판에 이르러서는 하루 천통 가량의 전화를 걸면서 당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끔직이 동생을 아끼는 형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혈투작전이라 없다.
이 부의장은 이 당선자가 겪는 고비때마다 결정적인 어드바이스를 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도록 했다.
위기국면을 승리로 이끌어
첫째가 박근혜 전 대표와 경선규칙 공방이 절정에 달해 일촉즉발의 위기에 달했을 때에 이 부의장은 이 당선자측이 박 대표 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원만히 해결토록 했고 결국 승리를 이끌어 냈다. ‘양보의 미덕’을 보인 것이다.
두 번째가 대선 3일전인 12월 16일 이른바 ‘이명박 특검법’을 수용토록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위기의 국면을 승리로 이끈’계기로 마련한 일을 들 수 있다.
대통합민주신당이 검찰의 BBK사건수사 결과 발표 직후부터 ‘이명박 특검법’을 발의하고 거세게 몰아붙이고 더욱 16일 오전 대통합민주신당이 ‘이명박 동영상’을 공개하여 온 국내가 술렁일 때에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물리적 충돌을 배제하고 특검법을 수용, 국회 대치상황이 풀리도록 주역을 맡아 했던 것이다. 위기의 국면을 관찰, 정확한 해결 방안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영남이 세력기반인 한나라당의 대통령후보의 취약지역은 호남- 특히 전남북일 수 밖에 없다. 이 후보 자신을 비롯 당 지도부도 그렇거니와 이 부의장의 호남공략은 필사적이었다.
자신이 속하는 기독교계에 파고들었다. 교회 교직자등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적극적으로 민심을 파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학계 약사회 실업계 당원교육등 전문가 단체포럼에 참여하였고 심지어 외식업단체에도 참석하였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광주선대위 정책본부가 주관해 열린 ‘광주지역 지식인 505명영입 이상득 부의장 초청회’ 참석을 들 수 있다. 이명박 후보 지지의 기류가 광주에 형성된 모멘트가 마련된 모임이라는 평이다.
또 충청권 민심잡기에 기울인 노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국민중심당의 심대평 후보를 사퇴토록 하고 그 합한 세력을 업고 나선 이회창 후보가 ‘이곳에서만은’이라는 기대를 무참히 짓밟도록 하고 이명박 후보가 득표 1위를 차지하게 한 것은 이 부의장과 강창희 전 최고위원의 힘이 컸음을 부인할 사람이 없다.
또 비록 믿는 종교는 다르나 이 부의장의 불교계에 드린 정성과 노력 또한 특기할 만하다.
가장 어려워하는 친형의 충고에 기대이 후보가 가장 어렵게 대하는 첫손에 꼽히는 친형인 이 부의장은 새 정부 출범 후에 계속 이 대통령의 후견인과 충고인역을 맡아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최고 통치자는 고독하면서도 자칫 독선 독존 아집으로 흐르기 쉬었다는 것은 지난 역사가 증명한다 할것이다. 여러 가지 원인 때문이겠지만 대통령이 어렵게 여기는 ‘어드바이저’를 두지 못했다는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당선자 곁에 6세 연상이며 정계 원로인 친형이 건재하고 있다는 것은 뜻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너무 가난했던 어린시절 “학교시간 학우들을 상대로 붕어빵을 팔 때에 여학생들이 볼까봐 모자를 푹 눌러쓰곤해 그때는 참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추억이 오늘날까지 살아온 모태가 됐다”고 부끄러움없이 술회하는 여유를 보이는 이 부의장에게 이런 단면이 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다.
학력 및 경력
동지상고, 육사중퇴, 서울상대졸, 주식회사 코오롱사장, 능률협회부회장, 발명특허협회부회장, 주한 세네갈명예영사, 13~17대국회의원,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사무총장·최고위원·국회재경위원장·운영위원장,한·구주의원외교협의회 회장, 국회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