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현대家 기업들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王회장으로 통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망 이후, ‘왕자의 난’과 ‘경영권 분쟁’으로 으르렁대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옛 현대 계열사를 공동 투자해 인수하거나 새로운 사업에 합작 파트너로 참여하는 등 범현대家 기업이 똘똘 뭉치고 있다. 이같은 행보엔 이명박 당선인의 힘을 얻고 있는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중심에 있다는 말이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다시 살아났다?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유례없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선보이며 눈길을 끌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힘이 되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최근 아버지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모델로 TV광고에 내보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정 명예회장의 어록 중 하나인 ‘이봐, 해봤어?’를 신문광고에 활용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정주영 명예회장을 전면에 내세운 파격적인 광고에 긍정적인 평가도 나오지만 이런 행보에는 뭔가 숨은 의도가 있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도 있다. 이 광고는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장녀인 정성이 씨가 고문으로 있는 이노션에서 제작됐다.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중공업이 현대가의 결속에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게 아니냐”는 해석을 한다. 현대중공업은 “자사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드러내기에 정 명예회장 만큼 좋은 모델이 없어 광고로 활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일련의 현대가 행보와 관련해서는 석연찮은 면모가 적지 않다.
지난 12월 말에는 현대그룹의 상징물이었던 종로구 계동사옥의 ‘현대’ 표석이 다시 세워졌다. 지난 2002년 현대.기아차가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 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치워졌던 표석을 5년 만에 다시 복구한 것이다. 현대차는 “지난 연말 범 현대가 모임에서 표석을 원상 복구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다고 표석의 복구과정을 말했다. 이 표석의 원상복구는 범 현대가의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항간에는 이 표석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에도 현대중공업이 막후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의 움직임은 범 현대가를 아우른다. 정몽준 최고위원은 지난 2월11일 정 명예회장의 아호를 딴 ‘아산정책연구원’을 출범시켰다. 정 명예회장의 아호를 쓴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은 정 최고위원이다.
현대가의 결집은 최근 곳곳에서 드러난다. 약속이나 한 듯 현대가 계열사 간 공동 인수, 합작 투자가 번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월에 있었던 한라건설의 만도 인수다. 한라건설은 KCC, 산업은행 사모펀드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약 6500억원에 만도를 인수했다. 범현대가 기업인 KCC는 현금 2600억원을 동원해 만도건설 컨소시엄에 참여함으로써 정몽진 한라건설 회장이 8년 만에 만도를 되찾아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현대자동차 역시 물밑 지원을 해줬다. 한라건설 컨소시엄이 1조원이 넘는 금액을 제시한 경쟁업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에 만도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차의 암묵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도가 최대 납품처인 현대차 그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KCC의 정상영 명예회장과 한라건설의 고 정인영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으로 형제지간이며,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이 조카다. 결국 한라건설의 만도 인수는 KCC, 현대차 등 범현대가의 협력의 산물인 셈이다.
현대가의 뿌리, 현대건설 인수에 총력
범현대가의 결집 징후는 지난달 18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 미수연 행사에서도 나타났다. 김영주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매제. 이날 김 명예회장의 88번째 생일잔치에는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정몽준 의원, 정의선 기아차 사장 등 정씨 일가 300명이 참석했다. 이때도 고 정주영 회장의 생전 모습과 육성을 담은 영상물을 보며 옛 현대그룹의 전성시대를 회상하는 범현대가의 모습이 연출됐다고 한다.
범현대가 기업들이 공동행보를 보이면서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 현대오일뱅크 등 과거 현대 계열사였던 기업들의 M&A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 중에서 현대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현대건설의 인수가 최대 관심사다. 현대건설 인수 의사를 밝히고 있는 곳은 현대그룹과 현대차, 현대중공업, KCC로 압축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현대건설 인수에 힘을 모을 것이라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특히 정몽준 의원은 현대가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현대건설 인수에 욕심을 낼 것이다. 정몽준 의원은 지난해 고 정주영 회장의 6주기 당시 기념관 건립의사를 밝혔을 정도로 현대가의 적통성에 관심이 높다. 정 의원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혼이 담긴 현대건설 인수로 적통성을 이어받고 범 현대가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따라서 현대중공업을 통해 현대건설 현대오일뱅크 등 옛 현대 계열사 인수에 성공하면 자동차를 제외한 정 명예회장 가업의 대부분을 이어받게 된다. 항간에는 정 의원의 이같은 행보가 차기 대권도전을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대건설 성공의 주역인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대권을 잡은 것과 관련, 정 의원 역시 추진력과 결단력 등으로 대변되는 王 회장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다는 말이다.
범현대가의 결집 구도에 유일한 변수는 현대그룹이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이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 지분을 8.3% 보유하고 있다. 때문에 현대건설 인수에 그룹의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현대그룹과 범현대가의 가업들과는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하다. KCC와는 지난 2003년 현대상선 경영권을 놓고 싸운 적이 있고 현대중공업과는 지난해 현대그룹의 현대상선 지분 취득문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 정몽준 의원을 중심으로 한 범현대가의 결속이 옛 현대그룹의 명성을 이어갈 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