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영 칼럼니스트] ‘미투 (나도)’ 보다는 ‘노우 No (아니오)’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란 생각이 든다. ‘미투’는 좀 수동적인 것 같고, ‘노우’는 능동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 내가 거절하는 주체가 되는 것.
한번은 제가 “미투 운동의 피해자와 정형식 판사의 이재용 판결, 친일파의 유사성”에 관해 글을 써 올렸더니 반론이 들어왔다.
내 글의 취지는 미투의 피해자가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는 논리의 정형식 판사의 판결, 또 일본의 권력 앞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한 친일파와 일면 유사성이 있다는 내용이 요지였다.
이분의 반론인즉, 일제시대 전쟁터로 끌려간 정신대 소녀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이들은 도망을 치다가도 붙들려 와서 갖가지 곤욕을 치렀다는 할머니의 증언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어 있었고, 군사조직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니 정말 어쩔 수가 없는 환경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군사력에 의한 압력과 강제 하에 있던 정신대 소녀는 대명천지 자유의 세계에 놓인 ‘미투’ 운동의 피해자여성과는 같을 수가 없다. 정신대소녀는 ‘노우‘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미투’ 가해자가 소위 양아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개 권력이 있거나 돈, 미모가 있는 남성들이다. 양아치에게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하면 고발을 하든지 부끄러워서 영원히 입을 다물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고발은 즉시 이루어지게 된다.
양아치에 대해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미투’ 운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지금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그 대상이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도 즉시가 아니라 다소간 세월이 흐른 다음에. 사회에서 ‘미투’ 운동을 순수한 성적 희롱으로 보지 않는 이들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차이점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만일 순수하게 성적 폭력의 문제라면 유명인사나 양아치나 같이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자영 교수
(전)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