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3일 서울의 ㅈ고등학교, 밤 9시가 넘어 도착한 이 학교는 주변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학교 주변은 가로등도 제대로 켜있지 않아 어두웠다. 자녀를 마중 나온 부모들의 자동차와 학원 통학차량 서너대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 조용했던 학교건물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자율학습 짜증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런데 왜요?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잖아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짜증나”를 연발했다.
이 학교 2학년 김주안 군(18 가명)은 “217 사교육비경감방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학교에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더욱 강제적으로 진행하려고 하는 것 같다”며 “대학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3학년에 올라가서 수능시험도 보기 병으로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몰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3학년 차윤성 양(18 가명)은 “학교수업 끝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하는데 강제로 보충수업을 받아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며 “말은 자율학습이지만, 우리나라에 고등학생들에게 자율적인 행동과 사고를 보장하는 학교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3학년 김진성(19 가명)군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향한다. 김군이 학원 수업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새벽 1쯤. 아침 0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7시30분까지 등교하려면 하루 5시간 자는 것도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되살아난 망령 ‘보충자율학습’
참여정부가 사교육비경감방안으로 내놓은 217 대책이 발표된 이후 일선 고교와 중학교에 ‘자율, 보충수업 망령’이 되살아났다.
중고등학교에서 ‘자율, 보충수업’이 사라진 것은 지난 1998년 DJ대통령 시절 당시 이해찬 교육부장관은 ‘2002학년도 대입제도개선안’을 발표하면서다. 기존 성적위주의 대입 관행 때문에 학생들이 피해를 입고, 고교간 학력차이를 인정하는 등급제를 전면 금지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방침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일부 학교에서는 암묵적으로 보충수업과 강제 자율학습을 실시해왔었고, 이번 2·17 방안발표로 인해 합법적인 테두리안에서 시행할 수 있게 됐다. 교육부는 보충자율학습을 부활하면서 강제가 아닌 자율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학교 현실은 교육부의 의도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책 발표이후 사교육비를 줄인다는 미명아래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등 교육정책이 당초 교육부 의도와는 다른 파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에 있는 학교보다 지방 학생들은 더욱 심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새학기 들어 광주지역 45개 인문계 고교 대부분이 보충자율학습을 실시했다. ㄱ고등학교의 경우 3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평일에는 오후 11시까지 자율학습을 실시하고, 토요일에는 오후 6시까지 심지어 일요일에도 오전 8시부터 6시까지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자 광주시교육청 인터넷 홈페이지 열린 마당에는 이를 비난하는 학생들과 학부형들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교사는 過勞死, 학생은 過學死”
고교 보충, 자율학습의 문제는 지난 3월27일 경기도 일산의 한 교사가 보충수업 도중 과로로 쓰러져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더욱 논란은 더욱 커졌다.
3월27일 전교조 홈페이지에 ‘아마도’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린 한 교육관계자는 “아마 모든 고등학교에서 강제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하고 있을 것”이라며, “(3월26일 보충 수업 도중 과로로 사망한 김형석 교사처럼)선생님들 과勞사 하시고, 학생들 역시 과學사 할까 두렵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한 학부형은 “새벽에 일어나 아침 굶고 학교가는 아들녀석이 저녁밥이나 제대로 먹고 야자 하는지 마음이 아프다”며 “선생님들 힘들게하고 학생들 희생시키는 0교시와 강제 야간자율학습을 없애달라”고 요구했다.
전교조가 밝힌 학교 현장의 보충 자율학습을 둘러싼 파행 운영의 유형은 새벽 0교시 실시와 심야보충, 자율학습 강요, 끝으로 ‘자율학습 감독비’ 명목의 찬조금 강요에 따른 학부모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자율, 보충수업 파행 실태
전교조는 지난 4월2일 서울 영등포 전교조 본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교육부의 ‘사교육비 경감방안’ 이후 파행사례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데 이어 8일에는 교사선언을 통해 교육부의 보충자율학습을 전면 거부할 뜻을 명확히 했다. 이후 각지역의 지부별로 교육청과 합의를 통해 파행운영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전교조의 실태 조사에 의하면 음성적으로 진행되어왔던 강제 자율학습과 0교시 보충수업 등이 217 사교육비경감방안 발표이후 합법의 테두리로 들어오게 돼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시중이며, 실시 예정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교조 광주지부는 4월2일 ‘보충·자율학습 전면 부활 반대 및 입시구조 개혁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교사와 학생 모두를 죽음로 내몰고 있는 강제 보충·자율학습을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서명에 동참한 이지역 56개 중·고등학교 교사 1,135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전교조 광주지부의 주장에 따르면, 일부 학교에서는 보충수업을 개설하고, 학생 1인당 월 9만원씩의 수업료를 받는가하면, ‘보충수업 과정에서 시험문제를 출제하겠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교조는 지난 4월8일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 타율학습, 0교시 반대’와 ‘입시구조 개혁 촉구’를 위한 전국 교사선언을 가졌다.
전교조는 “정부의 217 사교육경감방안은 경쟁 입시체제 해소와 학교교육 정상화에 기여하기는커녕 공교육을 왜곡시키고, 학생들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라는 경고한 바 있다”며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강행한 정책으로 인해 새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지금 교육현장에서는 파행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교조는 △입시지옥 강화하는 보충수업과 △’0교시’, ‘야간·강제수업’, ‘불법 찬조금’, ‘관리수당’ 등 파행적인 보충수업을 전면 거부하고, △우열반 편성이나 다를 바 없는 ‘수준별 이동식 수업’을 거부하며, △입시제도 개혁과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범국민 공교육 개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전교조 측은 이날 교사선언에 총 2만 217명의 교사들이 동참했다고 밝히고, “오는 4월22일 2차 교사선언을 한 뒤 5월초부터 불법적인 보충학습과 0교시 수업에 대한 전국적인 전면 거부에 들어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면 거부에 앞서 우선 교육부의 의지를 주시하겠다”며 “그 뒤에도 시정이 되지 않는다면 일선 학교장에게 전교조 조합원들의 불참을 통보하고, 학부모와 학생들에게도 이를 설명하는 등의 수순을 밟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