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차려라 농림부!
10월10일로 이경해
씨가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지 꼭 한 달이 됐다. 겨우 한 달인데 벌써 그의 죽음이 묻혀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그는 목숨을 바쳐 미국과
EU가 주도하는 세계무역기구의 횡포에 저항했다. 제5차 WTO 각료회의 협상이 결렬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힘이었다. 그런데 들러리를 서기
위해 칸쿤에 갔던 정부는 마치 자신들이 이뤄낸 결과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그런 정부를 보노라니 분노를 넘어 측은하기까지 하다.
농림부의 두 얼굴
선언문 채택없이 끝난 제5차 WTO 각료회의 결과에 대해 허상만 농림부 장관은 “향후 협상의 준거틀이 될 선언문 초안에 쌀 등 비교역적
관심사항 품목에 대해 관세상한선을 두지 않도록 하고, 개도국에 대해서는 절대 보호가 필요한 농산물을 특별품목으로 정해 개방을 유보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큰 성과였다”고 평가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 칸쿤에서의 모습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는 칸쿤에 갔을 때만 해도 어떤 전략도 없다고 스스로 고백했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옮기자면 “전략을 갖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였다.
즉 아무런 대책도 없었고, 세울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시쳇말로 알아서 기기만 할 생각으로 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정부 협상단은 각국 각료들과 해외 기자단 등에게 배포할 자료도 성의없이 준비했다. 이웃 일본의 경우는 철저히 준비해 자료의
양이 방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달랑 2장이 전부였다. 이 자료는 칸쿤회의에 임하는 우리의 입장이 담긴 것으로 타국의 각료와 기자단을 설득할 근거가 된다.
그럼에도 정부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것이다.
이경해 씨가 남긴 선물
정부는 그저 어쩔 수 없다고만 한다.
미국이 자국 국민들에게는 향후 10년 동안 1,80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농업보조금을 지급할 예정이면서 우리나라에는 농민들에게 농업보조금을
지급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항변 한 마디 못 하고 있다.
미국의 의도는 한국 등 타국 농업의 붕괴다. 그래야 농산물 수출이 용이해지고 자국 농민들이 잘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농민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농업개방의 결과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었던 우리 농민들은 빚더미에 올라서게 되었다. 현재 농가부채는 50조원이 넘는다.
이대로라면 2010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농촌이 사라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미국의 의도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상만 농림부 장관은 “농산물 개방은 이제 그 시간과 폭이 문제일 뿐”이라면서 농민들에게 아예 희망을 갖지 말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이게 한 나라의 농정을 책임진 자에게서 나올 소리인지 의심스럽다.
올 12월15일에는 WTO 실무자급협상이 열리고 제5차 각료회의에서 마무리하지 못 한 부분에 대해 논의될 예정이다. 또 내년에는 미국과
쌀개방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이경해 씨는 자신의 몸을 던져 한국정부에 협상을 준비하기 위한 몇 달간의 시간을 선물했다. 정부는 그 뜻을 충분히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제2, 제3의 이경해가 나올 수도 있다. 그 때면 정부는 진짜 농민의 적이 된다.
shkang@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