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한글 창제한 후 백성들을 가르쳤잖아요. 작가도 마찬가지에요.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만들어내도록 노력해야지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단색화의 선구자 하종현화백. 올해 한국나이로 미수(米壽)이나 150호 신작 대작을 그려낼 만큼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다.
국제갤러리가 15일 개막한 하종현 화백의 대규모 개인전<HaChong-Hyun>은 작가의 60년 화업을 잘 보여주는 ‘접합’ '다채색 접합' ‘이후 접합’ 시리즈 대표작 40여점을 내걸었다.
하종현 화백은 “끈질지게 해서 지금까지 마포와 물감과 전쟁에서 싸워왔다”고 밝혔다. 지난 2015년, 2019년에 이어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국제갤러리 3개관에 걸쳐 구작과 신작 대표작이 전시되어 작가의 한평생의 열정을 가늠케 한다. 또 이번 전시는 베니스비엔날레(4.21~8.24) 기간 중 열릴 베니스 팔라제토 티토 회고전에 앞선 병행전시이기도하다.
“제가 우리나이로 88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붓을 들고 작업을 고민합니다. 원초적인 에너지를 갖고 작품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실험할지, 물성 고민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번 최신작을그렸습니다.”
하종현의 색채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과 물성 탐구의 결과물을 한눈에 조망하면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평생 작업하며 살아온 노화가의 삶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특히 기존의 ‘접합(Conjunction)’ 연작과 여기서 비롯된 다채색의 ‘접합’, 그리고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새로운 방법론의 ‘이후 접합(Post-Conjunction)’ 연작 등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쉼없이 진화되고 확장되고 있는 하종현 화백의 작업세계는 구순에 다가가지만 여전히 명징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하종현 화백은 처음엔 소년처럼 들뜬 음성으로 그리곤 다정한 인생 선배로 말했다.
“저는 토종이에요. 지금 구순을 앞두고 있어 친구들도 많이 사라졌지만 저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지금도 어떻게 새롭게 그릴 것인지 생각해요.”(웃음)
젊은 시절, 술도 많이 마시고 대화도 많이 했다는 그는, “예전에는 해외에 많이 나가서 부러운 게 많았지만, 요즘은 외국에 안나가도 외국인들이 많이 오니 우리가 잘 살면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잘 살면 외국사람들도 찾아와요. 숙박 음식도 좋고, 우리가 더 좋은 문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평생 그림만 그리고 살다시피한 그는, 다소 불편하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체력과 여력을 가진 점에 감사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현대미술을 하다보니 작품이 잘 안팔려서 언젠가는 작품이 팔리기 바랬다”는 그는 “이제는 누가 내 그림을 가져갈까 걱정이에요”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들이 자꾸 세상을 하직하는데 “정부가 작가의 땀흘려 그린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두는 곳을 만들었음 좋겠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작고 작가를 기리는 미술관을 정부나 지자체가 만들어줬으면 하는 거다.
“지나간 사람의 흔적은 중요한 거에요. 수수한 원래의 태생적인 얼굴을 보여줘야 해요. 흔적을 그대로 남겨둘 장소가 필요한 거죠.”
한국전쟁 후 가난 덕에 만난 마포와 ‘접합’ 기법
하종현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는 6·25전쟁으로 나라의 모든 것이 피폐했다.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지만 가난해서 물감 살 돈이 없었다.
“결국 철사로 설치작업을 했죠. 그때 캔버스 살 돈도 없으니 마포를 쓰기 시작했죠. 나중에 숭숭 뚫린 마포의 구멍을 보면서 물감을 뒤에서 밀어내서 앞으로 나오게 하는 실험을 했죠.”
지금의 배압법(背押法)이 나오게 된 동기다. 올이 굵은 마포 뒷면에 두터운 물감을 바르고 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 올리면 마포의 씨실과 날술 사이로 물감이 꼬불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마치 생명체처럼 다채로운 형태로 올라오는 물감을 위에서 누르면서 노동집약적이고 독창적인 지금의 ‘접합(Conjuntion)’ 기법을 만들어냈다.
하종현 작가는 “다채로운 방법으로 캔버스를 만들고 이론을 만들어 가다보면 자신만의 작품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접합’ 작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하종현의 대표 연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접합’의 방식과 형태를 고수하되 색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이 반영된 다채색의 ‘접합’ 신작에서는 캔버스 뒷면에서 만들어진 작가의 붓 터치와 함께 흰색이 섞인 색의 그라데이션이 강조된다.
청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작품 ‘Conjunction 21-38’(2021)은 검정 물감으로 표면 밑작업을 한 마포의 뒷면에서 앞면으로 흰색 물감을 밀어넣고, 줄자를 대어 바탕에 줄을 그은 후, 그 위에 흰색 물감을 칠하고 다시 청색 물감을 얹히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기존 ’접합’ 연작에서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한국적인 색상이 주로 사용되었다면, 다채색의 ‘접합’ 신작에서는 일상적인 밝은 색상이 도입되어 보다 현대적으로 다가온다.
작가와 색채 간의 오랜 관계를 반영한 일련의 변화가 화면에서 더욱 풍부하게 변주된 색조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종현 작가는 다채색을 활용하는 이러한 열린 시도를 통해 오랜 시간 본인의 작업을 정의 내린 단색화라는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
‘접합’ → ‘다채색 접합’ → ‘이후 접합’으로 변신
가장 최근작은 ‘이후 접합’ 연작이다. 기존 ‘접합’ 연작의 주요 방법론이었던 배압법을 응용했다. 색과 형태뿐만 아니라 회화의 화면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 자체를 재해석하고 탐구한 작업이다.
‘이후 접합’에 대해 작가는 “나무 합판을 일정 크기의 얇은 직선 모양으로 자른 후, 나무 조각 하나하나에 먹이나 물감을 칠한 캔버스 천으로 감싼단다. 그후 이 나무 조각들을 화면에 배치하고, 나무 조각 바로 아래나 가장자리에 유화 물감을 약간 짠 다음 또 다른 나무 조각을 붙여 놓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물감이 눌리며 그 흔적이 나란히 배열된 나무 조각 사이로 스며 나오게 된다. 이렇게 전반적인 회화의 화면을 구성한 후, 때에 따라 ‘Post-Conjunction 11-3’(2011)에서 보이듯 스크래치를 해 역동적으로 표현하거나 ‘Post-Conjunction 10-38’(2010)처럼 유화 물감으로 덧칠해 화면의 리듬감과 율동감을 살리는 등 다채롭게 변주된 작업 방식은 각기 다른 형태와 뉘앙스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기존 ‘접합’ 연작이 마포를 평면적으로 사용하고 두터운 물감으로 물성을 살린 작업이라면, ‘이후 접합’ 연작은 나무 조각 자체의 물성으로 새로운 의미의 표면을 형성한다. 즉 평면에 조각적인 요소를 가미해 입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6.25전쟁 직후 비싼 물감 대신 사용했던 마포 자루, 철조망 그리고 밀가루 등이 당시 시대를 반영했다면, ‘이후 접합’에서 나무 조각 사용은 물성 탐구의 연장선으로 회화와 오브제의 ‘접합’을 이루죠. 한편으로는 조각같기도 한 새로운 회화적 평면을 만들어 ‘접합’을 확장했어요.”
평생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은 하종현은 물성 실험과 특유의 에너지로 직조된 평면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회화언어를 구축해왔다.
청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작품 ‘Conjunction 21-38’(2021)은 검정 물감으로 표면 밑작업을 한 마포의 뒷면에서 앞면으로 흰색 물감을 밀어넣고, 줄자를 대어 바탕에 줄을 그은 후, 그 위에 흰색 물감을 칠하고 다시 청색 물감을 얹히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기존 ’접합’ 연작에서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한국적인 색상이 주로 사용되었다면, 다채색의 ‘접합’ 신작에서는 일상적인 밝은 색상이 도입되어 보다 현대적으로 다가온다.
작가와 색채 간의 오랜 관계를 반영한 일련의 변화가 화면에서 더욱 풍부하게 변주된 색조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적 모더니즘의 개척자인 그는, 스스로 발견한 재료와 방식의 실험정신과 끈질긴 노동으로 지금 세계 미술시장에서 찬사를 받고 있다. 잠재된 정서를 회화로 소환시키는데 60여년 세월을 보내온 그는, 회화의 정의와 개념을 확장해온 기존 ‘접합’ 연작과 한발 진화한 ‘이후 접합’ 연작으로 보는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하종현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인 오는 4월 21일부터 8월 24일까지, 베니스 팔라제토 티토(Palazzetto Tito)에서 현지 비영리 기관인 폰다치오네 베비라콰 라 마사(Fondazione Bevilacqua La Masa)의 주최 하에 회고전을 개최한다. 국제갤러리 전시는 3월 13일까지.
하종현 작가는...
1935년 경남 산청 출생. 1959년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1990-1994)과 서울시립미술관 관장(2001-2006)을 역임했다. 밀라노 무디마 현대미술재단(2003), 경남도립미술관(200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2012)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했으며, 뉴욕, 런던, 파리 등 전세계 갤러리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선보였다.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2012),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 <단색화>(2015), 벨기에 보고시안 재단 <과정이 형태가 될 때: 단색화와 한국 추상미술>(2016), 상하이 파워롱미술관 <한국의 추상미술: 김환기와 단색화>(2018) 등 주요 단색화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하종현의 작품은 최근 소장된 파리 퐁피두 센터를 비롯해 중국 박시즈 미술관, 네덜란드 보르린던 현대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홍콩 M+, 도쿄도 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주요 미술기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