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철우 기자]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위력이 크지 않은 태풍 등이 다른 자연현상과 동시에 발생해 엄청난 파괴력을 내는 현상으로, 2008년 미국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경제용어로 진화했다. 당시 달러가치 하락과 유가 및 국제 곡물가격 급등에 물가 상승 등이 겹쳐지면서 나타난 초대형 복합 위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방역과정에서 풀어댄 막대한 ‘팬데믹 머니’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두 개의 서로 다른 위기로 세계 경제에 ‘퍼펙트 스톰’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서민들의 대표 음식인 ‘피시 앤드 칩스’ 음식점이 식자재값 급등으로 줄폐업 위기에 직면했다고 한다. 독일은 맥주의 핵심 재료인 맥아의 가격이 급등해 맥주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도 인플레이션을 피해 가지 못했다. 미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8%대로, 40여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세계 각국은 경제위기 대응에 비상이 걸렸다. 파격적인 금리인상을 연이어 발표하며 물가 잡기에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경제성장 전망치도 속속 당초 목표보다 하향 수정해 내놓고 있다. 세계은행은 올해 세계 경제성장 전망치를 기존 4.1%에서 2.9%로 하향 조정했다. OECD도 세계 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3.0%로 제시했다. 이는 지난해 12월 기준 전망치인 4.5%에서 1.5%p 대폭 하락한 수치다. 한국은 2.7%를 예상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더 보수적으로 보았다. 추 경제부총리는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기존 3.1%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반면 소비자물가 전망은 4.7%로 대폭 상향했다. 지난해 말 정부의 전망치였던 2.2%보다 2.5%p나 높인 수준이다. 정부가 제시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현실화된다면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인 2008년(4.7%) 이후 14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하게 된다. 세계를 덮친 복합위기가 경제의 불안정성을 키우면서 한국 경제가 살얼음판위에 놓여있다. 지금 서민들은 물건 하나 사기가 두려운 실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6월 3일 출근길 도어스테핑(Doorstepping)에서 지방선거 승리 소감을 묻는 질문에 “여러분은 지금 집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거 못 느끼느냐”고 되물었다. 이어 “경제위기 태풍권에 들어와있다”며 고물가와 저성장 등에 따른 경제위기 타개에 주력할 뜻을 밝혔다. 정치권도 앞다퉈 ‘민생’을 외치고 있다. 국민의힘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민생을 안정시키겠다고 공언하고, 더불어민주당 역시 먹고 사는 문제에 당력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한다. 여야가 이구동성으로 민생 메시지를 내놓고 있는 건 그만큼 ‘민생문제를 해결하라’는 여론의 압박이 크다는 방증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여야의 말과 행동이 따로라는 점이다. 시급한 민생 관련 입법처리를 위해선 국회를 열어야 한다. 하지만 의장단도 없고 상임위도 없는 국회 공백 사태가 벌써 두 달째다. 21대 국회 후반기 운영을 위한 원 구성 협상이 헛바퀴를 돌고 있는 탓이다. 여기에 당 권력 재편기에 들어선 여야 모두 계파 간 집안싸움이 한창이다. 민생을 외치지만 실제론 국회와 당 ‘권력 나눠먹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1998년 외환위기, 2009년 금융위기 당시 우리는 노·사·정 고통 분담 모델로 위기를 넘겼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하나로 뭉쳐 위기 해결에 앞장섰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정반대다. 고유가, 고환율, 고물가로 인한 국민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는데 정치권은 사분오열돼 정쟁에 빠져 있다. 한시적인 대책이라도 국민 부담을 덜 수 있다면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야 할 시급한 상황이라는 점을 잊은 듯하다. 정치권의 혼란이 경제위기의 공포를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