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갖고 늘 자신이 하고 싶은 새로운 것을 해야죠.”
늘 당당함과 자유로움으로 무장한 ‘문제적 작가’ 김구림(87). 그의 패기엔 세월도 비껴나있는 듯하다.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인 김구림은 이승택 이건용 이강소 성능경 등과 함께 참여한 ⟪오직 젊음 :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뉴욕 구겐하임)으로 뉴욕도 매료시켰다. 그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관심도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 마침 김구림의 70년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김구림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분명한 위치를 점하는 주요 작가이다. MMCA의 《김구림》전에는 김구림의 작업 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230여 점의 작품과 60여 점의 아카이브 자료가 총망라됐다. 이 회고전은 김구림의 미술가뿐 아니라 총체 예술가로서 미술사적 성과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담론과 연구를 지속 생성하는 자리다.
미술,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실험적인 전방위 예술가
2021년 암투병을 밝히며 조용히 칩거하는 듯 했던 김구림은, 이번 회고전을 위해 신작을 준비하는 등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러던 중 쓰러져 중환자실에 실려가며 주윗사람들을 긴장시켰으나 결국 심장박동기를 달고 오뚜기 마냥 일어섰다.
김구림은 경북 상주의 부잣집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한의사를 대대로 했던 집안이었으나 아버지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경주예고를 거쳐 경주 계림예대에 입학했으나 배울 것이 없다며 1학년 다니다 중퇴했다. 이후 미술은 독학으로 배웠다. 김구림은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내 화단에서 무시당하곤 했다. 늦은 나이에 미국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수학했다.
그가 존재감을 보인 것은 23세 때인 1959년. 대구 공회당 화랑에서 첫 개인전인 《김구림유화개인전》을 열었다. 대구의 한 섬유회사에 취직했다. 이후 부산으로 직장을 옮겼던 그는 큰물에서 놀겠다며 1968년 서울의 섬유회사로 다시 옮겼다. 당시 섬유회사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자연스럽게 영화를 공부하게 됐고, 그렇게 그의 첫 실험영화 ‘문명, 여자, 돈’이 탄생했다.
섬유회사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며, 당시 낯선 장르였던 비디오아트,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영화, 연극, 무용 등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또 기존 가치와 관습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견지해온 그는 회화, 퍼포먼스, 대지미술, 비디오아트, 메일 아트에 이르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지속해 왔다. 실험연극, 실험영화, 음악, 무용에도 종횡무진 개입해 왔다.
평생 ‘실험 미술’에 매진해온 다재다능한 작가
미술대학은 시시해서 그만두었던 청년 김구림은 미국 잡지를 보며 최신 예술 경향을 배우며 신선한 예술에 목말라했다. 1960~70년대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김구림과 같은 실험 미술가들은 종종 정부와 마찰을 빚곤 했다. 청년 김구림은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고, 집단 린치를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린 적도 있었다. ‘미친놈’이라 불리기도 했다.
1970년 김구림은 기성문화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또 관을 메고 거리를 걸은 후 관을 한강에 띄우는 마무리를 기획했지만 경찰이 덕수궁 앞 파출소에서 교통 방해죄를 물어 남대문 경찰소로 끌려갔고, 며칠간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후 김구림은 6개월간 미행을 당했고, 부친은 경찰서에 불려다니기도 했다.
당시 김구림은 잔디밭에 불을 질러 시커멓게 태워놓거나, 또는 40t 초대형 얼음이 실온에 녹아가는 모습을 선보였다.
평생 ‘새로운 미술’을 화두로 작업해온 김구림은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1/24초의 의미, 1969),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등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작품을 다채롭게 남겼다. 이때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 등 세계적인 미술기관들에 소장됐다.
전시장을 돌면, 대가의 첫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임에도 기획이 다소 부족해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시는 지하 1층 6전시실에서 시작된다. 작품 ‘걸레’가 관람객을 먼저 반긴다. 김구림은 1981년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 테이블 위의 천에 스며든 걸레의 얼룩을 실크스크린 작품으로 출품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시 주최측은 에디션을 낼 수 없으니 판화가 아니라고 했다. 작가는 변호사를 고용해 대응했고, 결국 주최측의 사과를 받아냈다.
전시장에 놓인 빗자루와 삽, 전구 등 다양한 물질과 재료를 활용한 입체물들도 눈길을 끈다. 김구림은 빗자루, 양동이, 전구 등 새 기성품을 사서 그 위에 채색하거나 사포를 이용해 표면을 마모시켜 작품을 만들었다.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보내는 오브제 작품이다.
1964년작을 2020년에 재제작한 ‘2개의 원’이나 ‘핵 0-64’(1964), ‘태양의 죽음’(1964) 등은 지금 보아도 현대적인 작품들이다. 이중 ‘태양의 죽음’은 해방과 전쟁을 겪은 김구림이 의가사 제대한 군시절 가깝게 보았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담은 작품이다. 비닐에 불을 붙여 태우고 담요로 끄고, 다시 태우고 하기를 여러번 반복적으로 한 작품이다. 즉 ‘회화가 아닌 회화’, ‘그리지 않은 회화’를 만들어 보려 했던 김구림의 첫 작품이다. 현재 영국 테이트 모던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 ‘핵’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회전하는 것 같은 작품이다.
또 얼음을 붉은 천으로 둘러싸고 얼음이 녹으면서 변화하는 작품과, 10년 전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에 출품했던 작품들의 작업 구상도 볼 수 있다. 작가는 1981년 서울 종로구 ‘구림판화공방’을 열고 동판화 메조틴트 기법을 국내에 처음 선보이며 판화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공간구조’는 1968년 ‘회화68’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창립전에서 선보인 작품. 구멍이 난 반구 형태의 플라스틱을 화면에 부착한 옵아트작품이자 국내 최초의 일렉트로닉 아트이다. 김구림이 1960년대 근무했던 섬유회사에서 사용했던 미싱의 부속품을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김구림은 끝없이 질문을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70년 제4집단을 결성해 죽음을 상징하는 관을 메고 깃발을 들고 가두행진을 했는데, 결국 정권의 눈밖에 나며 제4집단은 해체됐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에서의 3년여 체류 기간 도쿄에서 개인전도 했다. 이후 미국 뉴욕에서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수학하며 활동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작품 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지미술인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한국 실험영화사의 기념비적인 ‘1/24초의 의미’(1969)를 포함해 1960년대 초반 비닐, 불, 천 등을 이용해 제작한 추상 회화,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머물며 제작한 설치작 등 작가가 작업 초기부터 주목해 온 ‘현전과 현상’에 대한 오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등이 다양하게 걸려있다.
신작 <음과 양> 발표한 영원한 현역 작가
7전시실에서는 작가가 1984년 도미 후 자연에 관심을 가지며 제작한 실험적인 회화를 볼 수 있다. 나뭇가지 등을 화면에 부착해 자연과 인공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내보였다. 회화와 판화, 설치, 오브제 등 매체를 넘나드는 새로운 방법론을 향한 모색을 엿볼 수 있다. 또 작가의 대표 연작 <음과 양>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음양의 이치를 평면과 오브제,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 시각화하고자 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병고에도 불구하고 늙지 않은 문제 의식을 보여주는 <음과 양> 신작 2점이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돼 주목받았다. 영원한 현재진행형 작가의 모습에 애호가들의 호응은 크다.
아카이브 자료로는 포토콜라주 작업의 일부인 <불가해의 예술>(1970), 한국 최초의 역사적 대지미술 프로젝트로 한강변 언덕의 잔디를 불로 태워 흔적을 남긴 <현상에서 흔적으로>의 기록 사진(1970), 김구림이 참여한 공연작품 <이상의 날개> <살풀이 8> 기록사진 등이 있다.
전시 개막에 휠체어를 타고 전시장을 찾은 김 작가는 “전시를 통해 보여 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영화-무용-음악-연극 70여 명 출연한 공연도 펼쳐
한편, 지난 9월7일에는 MMCA다원공간에서 김구림 공연도 열려 주목받았다. 한국 실험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1/24초의 의미>(1969), <문명, 여자, 돈>(1969), 영화 상영을 시작으로 1969년에 시나리오, 안무, 작곡을 한 <무제>(무용), <대합창>(음악), <모르는 사람들>(연극)이 각 15분간 차례로 선보였다. 영화-무용-음악-연극에 70여 명의 출연자가 참여한 가운데 작가는 환영의 박수를 받았다. 전시는 내년 2월 12일까지.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