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전비조달을 위해 강제로 판 채권과 군표 등 일제금융수탈자료가 처음 공개됐다. 보험소비자연맹은 지난 15일, 16일 양일간 국회의원회관 2층 전시실에서 일제금융수탈자료 350여점을 일반인에 전시했다.
탱크와 비행기, 군함, 일장기 등이 그려진 전시저축채권, 대동아전쟁할인국고채권, 조선총독부 간이생명보험증서와 같이 간이보험을 유지, 권유하는 우체국장의 서신 등 일제가 전쟁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강매했던 증거자료들이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했고 1965년 한일경제협정으로 우리 정부에 의해 강제 포기된 개인소지 증서 등을 선보인 것이다.
일제시대 빈곤 금융수탈의 결과
보험소비자연맹에 따르면 일제는 1929년 식민통치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근검저축의 미풍함양’이라는 미명하에 보험가입과 저축을 강요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2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 체제를 구축하고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민저축조합령을 시행했다. 일제는 부락단위지역조합, 관공서, 학교 등 직역조합, 산업단체조합, 부인회, 청년단, 종교단체 등을 결성하고 간이보험이나 적금 등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농민들이 추수한 벼를 강제로 공출하고 현금이 아닌 보험증서나 채권으로 지급하면서, 부업으로 얻은 소득까지도 강이 보험료로 빼앗아 갔다. 배급을 받거나 생필품을 구입할 때 이 증서가 없으면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다. 곡물을 빼앗긴 농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리채를 얻어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금융수탈로 농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졌으며 그 빈곤이 극에 달했다. 광복 후 이 자산은 돌려받지 못했다.
1965년 일본과 한일협정을 맺었다. 그 부속 문서 중 하나인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일제시대 보상·배상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일제시대 피해자의 개인보상을 원천봉쇄 한 데 있다. 이 협정으로 정부는 피해자 개인보상이 아니라, 국가보상차원에서 돈을 받았고, 추후에 발생하는 청구권에 대한 문제는 각자 국내문제로 한다는 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배상받은 국제사례 있어“한국은 일본에게 더 이상 개인청구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정부가 문서로서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험소비자연맹은 말한다.
이 돈 중 일부(92억원)는 1975~1977년 국내에서 개인보상에 사용됐다. 이는 전체의 10%도 안 되는 금액이다.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이 있었지만, 경제발전의 이익이 공평하게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보험소비자연맹은 “일제시대 그 어려운 살림에도 반강제적으로 보험 등에 가입해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휴지조각처럼 남은 것을 가보처럼 소중하게 품어온 어른들이 있다”면서 “하지만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정부도 나몰라라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일본생명에 양로보험을 가입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보험금지급사유가 발생해 지급을 신청한 83세 노인은 대법원까지 싸웠지만 한일협정과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패소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 대학살' 희생자들이 한 세기가 지나서야 보상을 받았고,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유태인 생존자들이 40여년 만에 손해배상을 받은 국제사례가 있다.
한편 우리도 2005년 6월 국회의원회관에서 공청회를 시작으로 일제시대 보험 등 반환운동이 시작됐다. 보험소비자연맹은 일제강점하의 금융수탈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회서도 이를 보상하기 위한 법률안을 마련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