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나도 화폐수집
1월 22일 오전 9시 30분 한국은행 본점 앞. 새 돈 1만원권과 1천원 배부가 예정됐던 이 날은 아수라장이 됐다. 3일 전부터 화폐교환 창구 앞에서 노숙을 하며 대기했던 200여명과 당일 아침 신권을 받으러 온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크게 일었던 것. 이 날의 혼잡은 일찍부터 예고됐지만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한국은행은 일련번호 10001~30000번인 1만원권과 1천원권 새 지폐를 1인당 100장씩 최고 110만원어치를 교환해 주기로 했다.
3일 낮과 밤을 지새운 대기자들은 당일 자체적으로 번호표를 마련해 200번까지 교부했다. 현장에는 아르바이트로 고용돼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1만원권과 1천원권의 트리플 A(AA0010001A'번을 교환한 행운의 주인공이 된 이순근(50)씨는 당시의 감정을 “전쟁에서 이긴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왜 그렇게 새 돈에 집착한 걸까. 신권이 나오기 전부터 새 돈의 관심은 크게 증폭했다.
신권이 나오면서 화폐수집이 붐이 일기 시작했고 관련 동호회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신권 수집이 유행하면서 화폐 수집 인구도 과거 5천여 명 수준에서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화폐 수집 동호회인 ‘화폐사랑’ ‘수집본색’ 등은 회원 수가 각각 1만 명 이상이다. 수집용 화폐거래의 규모는 1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이한 번호의 지폐나 희귀한 주화가 액면가의 수천 배 이상을 웃돌면서 '돈 먹기 돈'이 되고 있다. 지난해 발행된 5천원권이 인터넷 경매에서 100장 한 묶음(50만원)이 5~10배에 거래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지난해 초 한국은행이 5천원 권 101번에서 10000번까지를 경매에 부쳤을 때 액면가보다 최고 82배가 비싼 410만 5천원에 낙찰되면서 신권 수집에 불을 지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화폐시장은 물론 화폐수집에 관심이 없던 일반인들도 너도 나도 신권에 매달리게 됐다. 각종 화폐시장에선 1만 원짜리 신권이 최대 10만 원에 팔리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신권에 프리미엄을 붙여 팔고 있다. 특히 새로운 1천원권과 1만원권이 발행된 뒤 일련번호 101~10000번 경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1천원권과 1만원권 각각 일련번호 1~100번인 ‘AA0000001A’~‘AA0000100A’ 100장씩은 한은 화폐금융박물관에 전시했다. 101~10000번은 인터넷 경매를 실시, 수익금을 전액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할 계획이고 10001~30000번까지는 선착순으로 일반인에게 교환해 줬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1천원권과 1만원권의 가격이 얼마나 형성될 지에 집중되고 있다.
신권 최고의 가치는
화폐 매니아들이 찾는 최고의 가치를 가진 화폐는 어떤 것일가. 화폐의 가치는 대체로 일련번호에 좌우된다. 우선 7777777과 같이 똑같은 숫자가 연속으로 나오는 ‘솔리드 노트’와 2000000과 같은 앞자리 수를 제외하고 0인 ‘밀리언 노트’, 1234567과 같은 오름차순, 또는 반대로 7654321과 같은 내림차순으로 된 ‘디센딩.어센딩 노트’같은 번호의 돈이다.
현재 화폐 수집상들 사이에서는 ‘AA0012345A’처럼 번호가 순서대로 올라가는 일명 ‘어센딩 노트’(ascending note)는 70만원대, ‘AA0033333A’ 처럼 같은 숫자가 반복되는 화폐는 20만원 선에서 시세가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온라인 경매업체 ‘옥션’은 신권 경매가 한창이다. 대부분의 판매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권이 빠른 번호, 연속번호, 특이번호, 양날개 레이더(대칭번호) 등의 구하기 힘든 '희귀종'이라며 광고한다. 한 판매자는 ‘신권AAA02포인트 만원천원 쌍둥이 다발’ 100장을 경매에 올렸고 280만원을 즉시구매가로 설정했지만 2월 8일 21시 현재가는 220만원에 입찰경쟁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판매자는 “초판 AAA권으로 천원권과 만원권이 같은 번호인 쌍둥이로 소장하는 기회를 가지라”며 구매를 부추겼다. 재래시장에선 황학동에서 1만원권 신권은 2만원~3만원, 남대문 지하상가에서는 트리플 A(AA0020000A) 번호를 가진 1만원권과 1천원권이 세트로 6만원까지 거래되고 있다. 화폐상들은 저마다 "지금 사두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며 부추기지만 화폐 전문가들은 “화폐 수집에 거품이 꼈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남대문 화폐상 한 모씨는 “언론의 과장된 보도 때문”이라며 “실제로 신권이 투자나 수집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화폐의 가격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이기 때문에 오를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설명이다.
신권 수집을 ‘투기’로 보는 사람들
요즘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거래되는 신권은 매주 300~400여건. 건당 매매가는 액면가의 2배에서 최대 100배에 이른다. 화폐 경매가 큰 돈을 불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자, 너도 나도 경매에 올리는 경우가 많다. 신권에 관한 경매가 수백건에 달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썰렁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매물에는 응찰자가 없어 터무니없는 입찰가를 제시한 판매자들을 무색케 하고 있다. ‘특급소장가치번호 0101010’이라고 광고한 판매자는 특급소장가치가 있는 다발 1만원권 100장과, 1천원권 100장을 250만원을 시작가로 경매에 올렸지만 2월 8일 현재 입찰자는 한 명도 없다. 그는 “눈여겨보면 다발 전체가 좋은 번호들이 많아 분명 소장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며 “행운의 주인공 한 분에게만 드리겠다”고 선심 쓰듯 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시장에선 신권발행과 함께 인기를 끌었던 앞번호 지폐 4만장이 공급된 이후 특이한 일련번호 확보를 위한 경쟁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1234567, 7777777 등 희소성 잇는 특이 번호 지폐가 수집대상으로 뜨고 있는 것이다. 숫자 앞뒤에 붙는 영문 알파벳이 일치하지 않으면 희소성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최근의 화폐 수집 열기에 일부 전문가들은 이미 가격에 “거품이 생겼다”고 말했다. 수집 경력 20년이 넘는다는 서모(45)씨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폐를 ‘수집’이 아니라 ‘투기’로 보고 있다”며 “가격 거품이 꺼지면 분명 손해를 볼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