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세상을 바꾼다
나노(nano) 기술, 사람들은 왜 여기에 주목하나
초미니 잠수함이 사람의 몸에 투입돼, 인체 구석구석을 항해하며 암세포를
발견하고 치료한다는 내용의 영화 ‘이너 스페이스’. 이 영화의 원작 ‘환상의 항해(A Fantastic Voyage)’ 저자인 물리학자
아이작 아시모프는 작품에서 가까운 미래에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가 병을 치료하는 로봇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당시만 해도 공상소설이나 영화속 일들로만 여겨졌던 이 같은 일들이 지금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나노(nano) 기술의
발달이 바로 이러한 세계를 가능케 한다.
나노의 세계는 극미의 세계
나노기술은 사물을 원자 단위인 나노미터(nm) 수준에서 연구하고 다루는 초정밀 기술을 말한다. 그리스어로 난쟁이란 뜻의 `나노스’(nanos)에서
유래된 `나노’(nano)는 현대과학에서는 `10억분의 1’이란 의미이며, 1nm는 머리카락 굵기의 약 10만분의 1이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 전자 현미경을 통해야 접근이 가능했던 극미의 세계가 나노의 세계다.
나노기술은 10억분의 1이라는 정밀도를 바탕으로 원자나 분자를 조작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시스템을 창조하는 기술을 말한다. 이러한 나노기술은
단지 아주 미세한 세계까지도 측정 가능하고 관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물질의 최소단위인 분자 또는 원자의 세계로 진입해 이를 조작,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숯을 다이아몬드로 변화시키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진다. 숯과 다이아몬드는 똑같은 탄소원자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나노기술을
이용해 숯의 원자배열을 바꿔주면 된다는 얘기다. 나노시대는 물질의 최소단위에까지 인간의 통제력이 미치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SF같은 21세기 열어 줄 나노기술
나노세계가 펼쳐지면 인류문명은 어떻게 변할까.
나노기술의 대부로 불리는 ‘창조의 엔진’(1986) 저자 에릭 드렉슬러는 “나노테크놀러지는 건강에서 식량 문제까지 인류의 모든 생활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작품에서 분자 크기의 암세포 파괴 기구를 만들어 몸속에 집어넣은 후 암세포만 골라 고통없이 병균을
없애게 한다거나, 나노 컴퓨터를 옷감에 장치해 외부의 기온과 습도를 옷감이 알아서 조절하는 의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노기술에 대한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는 최근, 드렉슬러의 주장이 실현되는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안아보인다.
본격적인 나노시대가 여는 인류문명은 이뿐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나노기술이 보편화되면 파리만한 공격용 비행기, 분자 크기의 암세포 파괴기구,
세포만한 컴퓨터 등도 개발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반면 나노기술이 인류문명을 파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서강대학교 화학과 윤병경 교수는 “인류가 나노기술의 발달로 인해 파리 또는
벌만한 크기의 스마트 비행체들의 제작이 가능해지면, 각 나라의 군대는 이들을 군사목적으로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30년
쯤 파리만한 극소형 스마트 비행체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주요 군사 및 산업기밀 수집, 요인암살, 군사시설 파괴 등의 가공할 만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영화 ‘코드명 J’를 보면 주인공은 뇌 속에 삽입된 메모리 확장장치로 인해 어린시절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또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인간의 뇌세포에 주입된 인공지능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한다. 나노시대가 되면 영화속에서나 벌어질 듯한 위험천만한 일들이 현실로 재현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미·일·유럽 앞다투어 투자
많은 과학자들이 21세기를 ‘나노 시대’로 분류한다. ‘마이크로 시대’인 20세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또 나노기술은 반도체 산업을
비롯해 현재 과학기술 분야에서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기술적 한계를 극복할 유일한 출구로 여겨진다. 나노기술 육성에 앞장서고 있는 선진국들은
여기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미국은 나노기술 개발전략을 통해 지난해부터 매년 4억달러 이상의 연구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일본도 앞으로
5년간 나노연구에 24조엔을 투자할 것이라고 하며, 유럽과 호주 등도 나노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나노기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10년까지 나노종합팹센터를 구축하게
됐다고 최근 발표했다. 나노팹은 나노기술을 구현하는 공동연구시설로 관련 장비를 갖추고 연구개발과 전문인력 양성, 기술이전 사업 등을 담당하게
된다.
포항공대 등 각 대학 연구소들도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내놓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9월16일 삼성전자가 세계 처음으로 초(超)미세 기술인
나노 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생산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회로선폭 90나노 양산기술을 적용해 2기가 NAND(데이터 저장용) 플래시메모리
시제품을 생산한 것이다. 이는 음악 CD 70장 분량을 저장할 수 있는 4기가 메모리 카드를 어른 엄지손가락만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다.
90나노 기술이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 지금까지 반도체 공정기술에서 ‘마의 벽’으로 인식돼 온 100나노, 즉 0.10㎛(미크론)을 뛰어넘었다는
것만도 의미가 크다. 또 삼성전자의 기존 주력산업 제품인 플래시메모리에 신기술을 접목함으로서 제품의 고부가 가치화와 고성능화, 생산비 절감
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큰 의미를 갖는다.
인류는 아주 가까운 시기에 단지 공상영화 이야기로만 여겼던 일들이 현실로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나노기술이 이러한
세계를 우리 앞에 근접시켜 놓고 있다.
정수영 기자 cutejsy@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