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차 남성 전업주부 B씨(42세)는 ‘00댁’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B씨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려놓았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바쁘다며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고 학교로 가는 것이 서운하기만 하다. B씨의 경우, 전문직에 종사하는 아내를 대신해 전업주부를 적극적으로 선택했다. 살림과 아이들 기르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젠 익숙해져 아이들 학원 알아보는 것은 물론 요즘엔 김치도 담근다. 학부모 모임에도 당당히 나가고 아이들이 아빠를 이해해주고 친해진 것이 큰 기쁨이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노는 남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미 만성화된 청년실업률은 전체실업률의 두 배가 넘는 7.5%에 달하고 구직자 포기 등을 포함하면 10%를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처자식이 달린 백수가장의 증가도 우리 사회의 심각한 취업난을 반증한다. 통계에 따르면 배우자 등 부양가족이 있으면서 실직 상태에 있거나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노는 남자’가 무려 200만명에 달하며, 이들 중 절반인 100만명 가량은 사실상 ‘백수’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은 우리의 현 주소이다.
‘육아와 가사는 아내 몫’이라는 인식 변화
이 같은 현상은 고소득 전문직 여성이 늘어나면서 남편보다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는 가구가 증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용시장에서도 여자에 비해 남자가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한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는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면서 “아울러 신규취업이나 재취업시장에서 남자들의 시장 진입이 힘들어지면서 실업 상태에 놓이거나 일자리 없이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는 이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아내 대신 살림하는 남편이 자연스러운 트렌드로 나타나기도 한다.
2003년 이후 가정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남성들이 다시 늘고 있다. 통계청의 <비경제활동인구> 통계에 따르면 2007년 말 집에서 아이를 돌보거나 살림을 맡고 있는 남성은 총 14만 3천명으로 2003년 대비 35% 증가했다. 여기에는 실직과 가족해체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가사와 육아를 맡게 된 남성들은 물론 평균 수명 연장으로 인한 고령자 1인 가구 증가와 고소득 전문여성 증가로 인해 능동적으로 가사노동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특히 고소득 전문직 여성의 증가로 인해 남성 가사자가 늘어나는 것은 ‘육아와 가사는 아내 책임’이라는 한국사회의 남녀 역할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노동부의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에 따르면 전체 여성 근로자 중 월급여 300만원 이상을 받는 비율이 지난 2003년 5.54%에서 2007년에는 11.1%로 약 2배 이상 증가했다. 이전처럼 실직의 부끄러움으로 쉬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아와 살림 노하우를 블로그와 방송 매체 등을 통해 널리 알리고 책으로도 펴내는 남성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남성전업주부의 역할을 맡는 것이 당당해졌다 해도 아직은 남성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주방기구가 여성 평균키에 맞춰 설계되어 있어 불편하고 아이 이유식을 만드는 것도 서툴기만 하다.
살림하는 남성들 위한 제품 속속 출시
실제 살림하는 남성들을 위한 가사 및 육아 도우미 제품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서툰 살림솜씨로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는 사이즈가 큰 다기능 고무장갑, 재료를 넣기만 하면 자동으로 이유식이 만들어지는 홈메이드 이유식기 등이 시중에서 팔리고 있다. 요리에 자신이 없는 남성을 위한 반조리 식품 판매도 늘어나고 있어 남성 전업주부의 힘을 덜어주고 있다. 간편 전자레인지용 젖병 소독기, 아이 울음 분석기와 욕실 세면대에 걸쳐 놓고 사용하는 미니 빨래판 등도 남성 전업주부들의 육아 및 살림 편의를 위한 제품이다.
유한킴벌리에서는 아빠들이 아기가 선 상태에서도 손쉽게 기저귀를 갈 수 있는 ‘하기스 매직팬티’를 내놓았고, 아가방에서는 기저귀 가방의 요란한 꽃무늬가 부담스런운 남편들을 위해 배낭을 가장한 기저귀 가방인 ‘백팩 조이’를 내놓아 인기를 끌고 있다.
이외에도 엄마의 심장박동소리가 녹음된 우유병도 아빠들을 위한 이색 도우미 상품이다.
주방가구업체 리바트는 85cm로 낮아 불편했던 싱크대 높이를 5㎝ 높여 90㎝짜리 싱크대를 내놓았다. 싱크대를 높인 대신 음식을 요리하는 가스레인지의 위치는 낮추어 편의성을 높였다. 주부들의 평균키가 높아진 통계를 활용한 것이지만 살림하는 남편들이나 독신남성들에게도 환영받고 있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의 아버지 요리교실에 남성들이 몰리고 백화점 남자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 설치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바로 남성전업주부 및 적극적인 육아 및 가사 분담을 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는 트렌드를 반영한 반가운 현상이다.
출판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 등의 요리책이 인기를 끈 것은 요리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해 따라하기 쉽고 간편한 요리 도서를 만들고자 한 기획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기혼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미혼여성을 앞지르고 고소득 전문직 여성들이 증가하면서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돌보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여자일과 남자일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보다 능력과, 적성, 부부간의 협의에 따라 경제적인 부양과 가사를 분담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또한 그런 분위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업환경, 국가의 가족정책 그리고 산업적 측면에서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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